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8>
"1,2심 판결(무기징역)은 너무 가벼운즉 다시 특별재판을 열고 나를 사형 시켜주기 바란다"
법정에서 이렇게 위풍당당하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근대뉴스가 백년전 오늘 이야기,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행적이 가슴을 울린다.

http://www.19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943 (1925.8.16 매일신보)
1925년 8월 16일 일본 왕을 살해하기 위해 동경 황궁 니주바시(二重橋 이중교) 앞에서 세발의 수류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1884-1928)의 재판 소식이 실렸다. 비록 폭탄의 불발로 무위에 그쳤으나 당시 사건은 1931년 이봉창의사의 폭탄 투척에 6년 앞서 일어난 것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경악케 하는 초유의 일이었다.
재판정에서 김지섭 의사는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였다.
김지섭 의사의 호연지기를 보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당시 행적을 소개한다.
1923년 9월 일본 동경 지방을 휩쓴 관동대지진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군·관·민에 의해 학살당하자, 이에 격분한 의열단이 결사 단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들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김지섭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37세이던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관동대지진 발생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자 비분강개한 그는 결사를 위한 실행대원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밀령을 받은 즉시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였다. 1924년 1월 3일 열차편으로 동경에 잠입한 그는 먼저 거사 목표를 일본 제국의회(帝國議會)로 잡았다.
제국의회가 개회되는 때에 맞추어 회의장에 투탄함으로써 일제 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제국의회가 휴회중이었는데다가, 여비가 떨어지고 신변의 위험이 점차 급박해지는 상황에서, 무작정 의회가 개회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사 대상을 일본 궁성의 천황을 폭살하는 쪽으로 목표를 수정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 궁성 주변을 내왕하며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일본 궁성 경비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다고 판단하고 경찰을 쓰러뜨린 뒤 폭탄 1개를 던졌다.
그리고 일본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이중교를 뛰어 건너가며 다시 1개의 폭탄을 위병들을 향하여 던졌다. 당초에는 이중교를 폭파하고 소란한 틈을 이용하여 황궁내에 들어가 천황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발의 폭탄이 모두 불발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위병에게 잡힌 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사용한 폭탄이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한 강력한 폭발력의 정상적인 폭탄이었음을 주장하였다. 불발된 원인에 대해 오랫동안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습기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1925년 동경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며,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며 계속 항거하다가 1925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의거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천황에 대하여 폭살을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경악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한국 침략의 원흉인 천황을 죽이려 하였다는 데 큰 쾌감과 긍지를 느끼게 하였다.

1925.10.15 동아일보가 보도한 공판 사진. 왼쪽 3번째 O표시를 한 사람이 김지섭의사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당시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일본 정부가 철저히 묻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사건은 석달여 후인 4월 25일 동아일보의 보도로 처음 알려졌지만 ‘이중교 폭탄범인 김지섭’이라는 제목과 당국이 신문게재를 일체 금지했다면서 구체적 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내무차관 스카모토가 책임을 추궁당했으며 교토 지방의 경시총감과 경찰부장이 파면당하는 여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엽전표 서울고무신의 추억 (2025.3.11.)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7>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m0604&wr_id=12590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8>
"1,2심 판결(무기징역)은 너무 가벼운즉 다시 특별재판을 열고 나를 사형 시켜주기 바란다"
법정에서 이렇게 위풍당당하게 말할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근대뉴스가 백년전 오늘 이야기, 김지섭(金祉燮) 의사의 행적이 가슴을 울린다.
http://www.19c.co.kr/news/articleView.html?idxno=49943 (1925.8.16 매일신보)
1925년 8월 16일 일본 왕을 살해하기 위해 동경 황궁 니주바시(二重橋 이중교) 앞에서 세발의 수류탄을 던진 김지섭 의사(1884-1928)의 재판 소식이 실렸다. 비록 폭탄의 불발로 무위에 그쳤으나 당시 사건은 1931년 이봉창의사의 폭탄 투척에 6년 앞서 일어난 것으로 제국주의 일본을 경악케 하는 초유의 일이었다.
재판정에서 김지섭 의사는 “조선 사람은 조선의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한 사람, 최후의 순간까지 항쟁할 것이다. 사형이 아니면 나를 무죄로 석방하라”고 당당하게 요구하였다.
김지섭 의사의 호연지기를 보면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수록된 당시 행적을 소개한다.
1923년 9월 일본 동경 지방을 휩쓴 관동대지진 당시 수많은 한국인이 일본의 군·관·민에 의해 학살당하자, 이에 격분한 의열단이 결사 단원을 일본에 파견하여 일제의 주요 기관을 파괴하고 요인들을 암살하고자 하였다.
김지섭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37세이던 1922년 의열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관동대지진 발생후 수많은 조선인들이 학살당하자 비분강개한 그는 결사를 위한 실행대원이 되었고 같은 해 12월 단장 김원봉(金元鳳)으로부터 밀령을 받은 즉시 일본인으로 가장하고 배편으로 일본에 도착하였다. 1924년 1월 3일 열차편으로 동경에 잠입한 그는 먼저 거사 목표를 일본 제국의회(帝國議會)로 잡았다.
제국의회가 개회되는 때에 맞추어 회의장에 투탄함으로써 일제 요인을 일거에 폭살시키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 제국의회가 휴회중이었는데다가, 여비가 떨어지고 신변의 위험이 점차 급박해지는 상황에서, 무작정 의회가 개회될 때를 기다리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거사 대상을 일본 궁성의 천황을 폭살하는 쪽으로 목표를 수정하였다. 이에 앞서 그는 일본 궁성 주변을 내왕하며 동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일본 궁성 경비 경찰의 불심검문을 당하자,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었다고 판단하고 경찰을 쓰러뜨린 뒤 폭탄 1개를 던졌다.
그리고 일본 궁성으로 들어가는 다리인 이중교를 뛰어 건너가며 다시 1개의 폭탄을 위병들을 향하여 던졌다. 당초에는 이중교를 폭파하고 소란한 틈을 이용하여 황궁내에 들어가 천황을 죽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두 발의 폭탄이 모두 불발됨으로써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위병에게 잡힌 뒤,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자기가 사용한 폭탄이 여러 차례의 실험을 통한 강력한 폭발력의 정상적인 폭탄이었음을 주장하였다. 불발된 원인에 대해 오랫동안 배를 타고 오는 도중에 습기가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1925년 동경공소원(東京控訴院)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며, 옥중에서 단식투쟁을 전개하며 계속 항거하다가 1925년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의거는 일본인들로 하여금 신성불가침의 존재인 천황에 대하여 폭살을 기도하였다는 데에서 경악하게 하였다. 그리고 우리 민족에게는 한국 침략의 원흉인 천황을 죽이려 하였다는 데 큰 쾌감과 긍지를 느끼게 하였다.
1925.10.15 동아일보가 보도한 공판 사진. 왼쪽 3번째 O표시를 한 사람이 김지섭의사다
엄청난 일을 해낸 독립운동가지만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당시 김지섭 의사의 의거를 일본 정부가 철저히 묻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국내에서 사건은 석달여 후인 4월 25일 동아일보의 보도로 처음 알려졌지만 ‘이중교 폭탄범인 김지섭’이라는 제목과 당국이 신문게재를 일체 금지했다면서 구체적 내용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 내무차관 스카모토가 책임을 추궁당했으며 교토 지방의 경시총감과 경찰부장이 파면당하는 여파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엽전표 서울고무신의 추억 (2025.3.11.)
백년전(百年前) 오늘 신문<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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