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윤의 영화노트’
감독 : 팀 밀란츠
주연 : 킬리언 머피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오랫동안 아일랜드 사회에서 은폐(隱蔽)되어 왔던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Laundries)’ 사건을 배경에 두고 있다. 이 시설들은 가톨릭 수녀회가 운영했던 여성 수용 시설로 미혼모나 낙인 찍힌 여성들, 혹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려진 어린 소녀들에게 강제 노동과 인권 유린이 자행된 비극적인 공간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학대와 착취를 겪었고, 아일랜드 사회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영화의 주인공 빌 펄롱은 작은 석탄 배달 회사를 운영하며 아내와 다섯 딸을 부양하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석탄 배달을 위해 수녀원에 간 펄롱은 창고에 갇힌 소녀 사라를 발견한다. 펄롱은 자신을 밖으로 데려가 달라며 호소하는 사라를 만난 뒤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 기억들과 마주하며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침묵의 구조
펄롱은 미혼모였던 어머니와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자신이 누군가의 친절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사라를 구하려 하지만 원장 수녀는 펄롱에게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딸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은밀하게 돈을 건네며 침묵(沈默)의 대가를 제시한다.
이 순간 펄롱은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배해 온 침묵의 구조를 마주한다.
종교적, 사회적 권력이자 공동체의 중심인 수녀원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고 누구도 그 영향력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펄롱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가족을 지켜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한다.
두 개의 다른 세계
크리스마스 선물로 ‘퍼즐'을 가지고 싶었지만 잠자리를 덥혀 줄 '물 주머니'를 받은 펄롱의 어린 시절의 회상 장면은 현재 그의 갈등인 현실의 존재 방식과 내적 존재 방식의 대립을 암시한다.
물주머니를 받은 펄롱은 온 몸을 떨며 울음을 참다 밖으로 뛰쳐나가 맨 손으로 얼음을 깬다. 펄롱의 이러한 격한 반응은 단지 원하지 않은 것을 받은 실망한 아이의 분노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용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어른의 세계를 깨닫고 욕망에 충실한 아이의 삶의 기대 방식이 처음으로 균열(龜裂)된 충격의 분노이다.
이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것은 펄롱과 아내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괜찮은 거야?”
“글쎄, 돈 들어갈 데가 많아.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야 하잖아,”
“우리 괜찮은 거야?”
“응, 적금도 타니까 그걸로 창문도 수리할 수 있어.”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 살 수도 없는 아내의 현실적인 세계관은 생계를 위해 실용이 삶의 조건으로 우선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의 감각과 양심을 외면하고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를 묻고 있는 펄롱에게 아내의 대답은 퍼즐 대신 물주머니를 받은 어린 펄롱의 크리스마스 선물과 닮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드는 구조악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려는 펄롱의 아내의 현실적인 사고는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인 합리성과 실용의 가치가 사회에서 정당한 구조 논리로 강화될 때 개인의 고통은 ‘비효율적’으로 분류되어 타자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점점 사라진다.
곧 내 가정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타인의 고통에 침묵해야 하는 구조에 놓이게 되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곧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라를 구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괴로워하는 펄롱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 이에요. 살아가려면 모른척 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야…
보통 사람들의 당연해 보이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악은 평온한 일상 속에 이렇게 조용히 흡수된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것은 자기 안의 자신을 만나는 것
영화는 펄롱의 내면의 모습에 조용히 오래 머문다.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과거를 떠올리며 침묵하는 시간, 석탄 배달 후 손에 묻은 검은 숱 검댕이를 강박적으로 닦아내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윌리 삼촌을 찾아가는 것 등은 근원적인 상처들을 만나며 펄롱이 자기 존재를 회복하는 모습들이다.
결국 펄롱은 사라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인간다움은 흔들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사라를 데리고 나온 이 후 앞으로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어떠한 암시도 담고 있지 않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 인상깊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는가?’ 또는 ‘가족들이 겪는 피해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가?’등의 냉소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세상의 원리에 따라 자신을 잃어가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다움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사유를 권한다.
인간다움의 감각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할 때 자신의 내면의 작은 파동들을 감각하는 것이다.
타인을 돕기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타인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이미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존재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 펄롱은 땔감을 구하러 산 길을 돌아다니는 가난한 소년을 긴 시선으로 응시하다 다가가 말을 건넨다.
“얘야, 잠깐만…너 괜챦니?”
작은 흔들림이 작은 용기가 되는 순간 세계가 다른 숨결을 갖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 박성윤 문화칼럼니스트

‘박성윤의 영화노트’ :
영화를 통하여 세상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방황과 사유, 그 순간들을 기록하는 작은 여정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박성윤의 영화노트’
감독 : 팀 밀란츠
주연 : 킬리언 머피
영화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은 클레어 키건(Claire Keegan)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오랫동안 아일랜드 사회에서 은폐(隱蔽)되어 왔던 ‘막달레나 세탁소(Magdalene Laundries)’ 사건을 배경에 두고 있다. 이 시설들은 가톨릭 수녀회가 운영했던 여성 수용 시설로 미혼모나 낙인 찍힌 여성들, 혹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버려진 어린 소녀들에게 강제 노동과 인권 유린이 자행된 비극적인 공간이었다. 많은 여성들이 학대와 착취를 겪었고, 아일랜드 사회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해왔다.
영화의 주인공 빌 펄롱은 작은 석탄 배달 회사를 운영하며 아내와 다섯 딸을 부양하며 살아가고 있는 평범한 가장이다.
크리스마스를 앞 둔 어느 날, 석탄 배달을 위해 수녀원에 간 펄롱은 창고에 갇힌 소녀 사라를 발견한다. 펄롱은 자신을 밖으로 데려가 달라며 호소하는 사라를 만난 뒤 마음 속 깊은 곳에 묻혀 있던 어린 시절 기억들과 마주하며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는다.
침묵의 구조
펄롱은 미혼모였던 어머니와 가난한 환경 속에서 자란 자신이 누군가의 친절로 삶을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사라를 구하려 하지만 원장 수녀는 펄롱에게 이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외부에 알려져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그의 딸들에게 불이익이 돌아갈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은밀하게 돈을 건네며 침묵(沈默)의 대가를 제시한다.
이 순간 펄롱은 오랫동안 이 마을을 지배해 온 침묵의 구조를 마주한다.
종교적, 사회적 권력이자 공동체의 중심인 수녀원은 마을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고 누구도 그 영향력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펄롱은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와 가족을 지켜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갈등한다.
두 개의 다른 세계
크리스마스 선물로 ‘퍼즐'을 가지고 싶었지만 잠자리를 덥혀 줄 '물 주머니'를 받은 펄롱의 어린 시절의 회상 장면은 현재 그의 갈등인 현실의 존재 방식과 내적 존재 방식의 대립을 암시한다.
물주머니를 받은 펄롱은 온 몸을 떨며 울음을 참다 밖으로 뛰쳐나가 맨 손으로 얼음을 깬다. 펄롱의 이러한 격한 반응은 단지 원하지 않은 것을 받은 실망한 아이의 분노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실용적인 선택을 요구하는 어른의 세계를 깨닫고 욕망에 충실한 아이의 삶의 기대 방식이 처음으로 균열(龜裂)된 충격의 분노이다.
이 두 개의 세계가 충돌하는 것은 펄롱과 아내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괜찮은 거야?”
“글쎄, 돈 들어갈 데가 많아. 아이들 크리스마스 선물도 사야 하잖아,”
“우리 괜찮은 거야?”
“응, 적금도 타니까 그걸로 창문도 수리할 수 있어.”
빵만으로 살 수 없지만 빵 없이 살 수도 없는 아내의 현실적인 세계관은 생계를 위해 실용이 삶의 조건으로 우선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우리의 감각과 양심을 외면하고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를 묻고 있는 펄롱에게 아내의 대답은 퍼즐 대신 물주머니를 받은 어린 펄롱의 크리스마스 선물과 닮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침묵이 만드는 구조악
안정된 일상을 유지하려는 펄롱의 아내의 현실적인 사고는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필수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가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현실적인 합리성과 실용의 가치가 사회에서 정당한 구조 논리로 강화될 때 개인의 고통은 ‘비효율적’으로 분류되어 타자에 대한 윤리적 감각이 점점 사라진다.
곧 내 가정의 안전과 평온을 위해 타인의 고통에 침묵해야 하는 구조에 놓이게 되면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 곧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이 작동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라를 구하지 않고 집에 돌아와 괴로워하는 펄롱에게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와 상관없는 일 이에요. 살아가려면 모른척 해야 하는 것도 있는 거야…
보통 사람들의 당연해 보이는 현실적인 선택으로 악은 평온한 일상 속에 이렇게 조용히 흡수된다.
타인의 고통을 감각하는 것은 자기 안의 자신을 만나는 것
영화는 펄롱의 내면의 모습에 조용히 오래 머문다.
밤에 잠을 못 이루고 창 밖의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과거를 떠올리며 침묵하는 시간, 석탄 배달 후 손에 묻은 검은 숱 검댕이를 강박적으로 닦아내는 모습,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윌리 삼촌을 찾아가는 것 등은 근원적인 상처들을 만나며 펄롱이 자기 존재를 회복하는 모습들이다.
결국 펄롱은 사라의 손을 잡고 수녀원을 나와 자신의 집으로 향한다.
인간다움은 흔들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펄롱이 수녀원에서 사라를 데리고 나온 이 후 앞으로 가족들이 어떤 어려움을 겪게 될지 어떠한 암시도 담고 있지 않은 이 영화의 마지막이 인상깊다.
‘그래서 세상이 바뀌는가?’ 또는 ‘가족들이 겪는 피해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지 않는가?’등의 냉소를 허용하지 않는 대신 세상의 원리에 따라 자신을 잃어가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인간다움의 윤리적 감각을 회복하는 것에 대한 사유를 권한다.
인간다움의 감각은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의 얼굴을 마주할 때 자신의 내면의 작은 파동들을 감각하는 것이다.
타인을 돕기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받고 있는 타인이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아도 이미 나를 향해 말을 걸고 있는 존재 자체를 느끼는 것이다.
영화 초반부 펄롱은 땔감을 구하러 산 길을 돌아다니는 가난한 소년을 긴 시선으로 응시하다 다가가 말을 건넨다.
“얘야, 잠깐만…너 괜챦니?”
작은 흔들림이 작은 용기가 되는 순간 세계가 다른 숨결을 갖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글 박성윤 문화칼럼니스트
‘박성윤의 영화노트’ :
영화를 통하여 세상의 숨겨진 아름다움과 삶의 가치를 발견하려는 방황과 사유, 그 순간들을 기록하는 작은 여정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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