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폐하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이범진이 고종에게 남긴 유서--
1840년 중국은 아편전쟁(阿片戰爭) 패배 이후 계속된 서구열강의 침략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붕괴를 맞이하고 있었다. 1860년 중국(청)은 러시아와 베이징조약 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중국은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해 주고 한반도 북쪽에서도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선을 확정한다. 베이징조약의 영향은 조선에도 미치게 되어 조선도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쇠락해가고 일본이 침략적 의도를 노골화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동북아의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는 조선정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서양세력과 러시아에 연거푸 힘없이 무릎 꿇는 모습을 지켜 본 조선 내에서는 중국만을 의지해서는 외국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가의 독립과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들이 자리 잡게 된다. 조선은 독립과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강대국을 모색 중이었고 러시아가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종과 조선정부는 동아시아의 정세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대응했다. 조선에게 미국, 영국 등 서구세력은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로 여겨졌다. 조선은 나름대로 기존의 중국중심주의로부터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으로의 변화를 추구했고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 들이는 것이 조선의 이익에 맞는다는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범진은 그러한 친러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범진의 생애와 활약
이범진은 1852년 9월 3일 서울에서 고위관료였던 이경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비교적 평탄하게 다양한 고위 관직을 역임했고 지방관으로도 활약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 조선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억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범진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을 위해 춘생문사건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중국으로 잠시 망명을 떠났다.
1896년에 귀국해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새로운 내각에서 법부대신을 맡았다. 그는 을미사변을 재조사하여 일본의 책임을 밝히려 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의 압박으로 조선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주미공사로 임명되었다.
1899년 이범진은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오스트리아까지 3개국 주재공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3국공사의 겸직이 해제되고 러시아 상주 대한제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러공사 시절 대한제국의 국권수호하고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이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범진의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적 노력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1904년 2월에 일본은 ‘한일의정서’ 의 체결을 강요하고서 조선 조정에 이범진의 본국 소환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강요에 못 이긴 고종은 5월 18일에 러시아 상주 공사관의 폐쇄와 함께 이범진을 소환을 명령한다. 하지만 고종은 이범진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의 압박에 의한 귀환 명령을 무시하고 러시아에 남을 것”을 지시한다. 이 따라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과 함께 공사관이 폐쇄되는 1906년 초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범진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06년 헤이그 특사를 지원한 것이다. 고종은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상설.,이준, 등 특사를 밀파하여 열강을 상대로 구국외교를 펼치게 한 것이다. 이범진은 특사단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범진은 외국어에 능통한 자신의 둘째 아들 이위종을 특사단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하였다. 당시 영어,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이위종은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 한국의 입장과 처지를 폭로하는 활동을 벌일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범진이 기대를 걸었던 헤이그 특사활동도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거두지 못하고 만다.
이후 이범진이 주력한 것은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독립운동이었다. 연해주는 1860년대 이래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있었고 특히 울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무대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범진은 연해주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08년 봄 연해주에서 최재형과 이범윤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 를 편성할 때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들 이위종이 연해주를 방문했을 때 이범진은 당시 매우 큰 금액인 1만 루블을 군자금으로 보냈다
이범진은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아 번민하다가 조선 선비들이 역사적 책임을 통감할 때 결행하곤 했던 방식에 따라 191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殉國)하였다. 그는 순국하기 전에 남은 유산을 미국과 연해주의 각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나누어 보내주도록 조치해 마지막까지 독립을 향한 자신의 염원을 드러내었다.
이범진의 구국외교활동의 현재적 의미
19세기말에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일전쟁, 포츠머스 강화회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및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이후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는 항상 이범진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와 한반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외교 활동 및 해외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유지와 안전보장이라는 100년 전의 과제는 현재 시점에서도 대한민국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책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울어가는 조선의 독립유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 이범진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19세기 중국중심의 동아시아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상황에서 한반도가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갔던 상황은 지금 시기 미국중심의 단극세계체제가 다극세계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북아 안전보장체계 수립을 목표로 했던 근대 한러관계는 지금에 와서 비록 굴절된 모습이지만 북한과 러시아와의 급속한 정치군사적 밀착 상황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한러관계의 역사적 특징은 한국과 러시아는 접경국가로서 관계증진을 위한 상호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변 열강들과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관계발전이 저해되거나 단절되는 경험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2022년 우크라이나사태 발발 이후에 한국이 미국 서방의 제재에 참여함으로써 급속히 냉각되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한러관계에서도 다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이범진이 활약하던 망국(亡國)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한국의 안전보장과 독립회복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이범진의 활동과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정책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범진의 외교활동과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외교정책의 역사적 경험은 또 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는 동북아에서 한국의 대러시아 외교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원로한국사학자 유리 바닌 교수는 예전에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준 적이 있다. 이것으로 짧은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러시아가 특별히 한국을 위해서 대 동북아정책을 펼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자신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상 러시아의 정책은 한국에 이익이 되는 점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러시아에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글 김원일 | 정치학박사, 모스크바시립대 교수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원일의 모스크바 뉴스’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kwil&page=2
황제폐하께,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이범진이 고종에게 남긴 유서--
1840년 중국은 아편전쟁(阿片戰爭) 패배 이후 계속된 서구열강의 침략과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으로 내우외환(內憂外患)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동아시아 국제질서가 붕괴를 맞이하고 있었다. 1860년 중국(청)은 러시아와 베이징조약 을 맺었다. 조약에 따라 중국은 러시아에게 연해주를 할양해 주고 한반도 북쪽에서도 두만강을 경계로 중국과 러시아는 국경선을 확정한다. 베이징조약의 영향은 조선에도 미치게 되어 조선도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게 되었다. 당시 청나라의 쇠락해가고 일본이 침략적 의도를 노골화해 가고 있는 상황에서 새롭게 동북아의 강자로 등장한 러시아는 조선정부의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중국이 서양세력과 러시아에 연거푸 힘없이 무릎 꿇는 모습을 지켜 본 조선 내에서는 중국만을 의지해서는 외국의 침략을 방지하고 국가의 독립과 안전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겠다는 생각들이 자리 잡게 된다. 조선은 독립과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새로운 강대국을 모색 중이었고 러시아가 그런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고종과 조선정부는 동아시아의 정세가 러시아를 중심으로 펼쳐질 것이라고 예상하고 대응했다. 조선에게 미국, 영국 등 서구세력은 거리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들로 여겨졌다. 조선은 나름대로 기존의 중국중심주의로부터 실용주의적 외교노선으로의 변화를 추구했고 러시아를 조선에 끌어 들이는 것이 조선의 이익에 맞는다는 세력이 서서히 형성되었다. 이범진은 그러한 친러파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범진의 생애와 활약
이범진은 1852년 9월 3일 서울에서 고위관료였던 이경하의 아들로 태어났다. 26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비교적 평탄하게 다양한 고위 관직을 역임했고 지방관으로도 활약했다.
1895년 청일전쟁 이후에 조선은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을 억제하려는 정책을 시행하려 했고 이에 반발한 일본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다. 이범진은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을 위해 춘생문사건을 주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중국으로 잠시 망명을 떠났다.
1896년에 귀국해 아관파천을 주도하고 새로운 내각에서 법부대신을 맡았다. 그는 을미사변을 재조사하여 일본의 책임을 밝히려 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의 압박으로 조선조정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주미공사로 임명되었다.
1899년 이범진은 주러시아 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오스트리아까지 3개국 주재공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3국공사의 겸직이 해제되고 러시아 상주 대한제국 공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주러공사 시절 대한제국의 국권수호하고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이고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이범진의 국권수호를 위한 외교적 노력은 1904년 러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새로운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1904년 2월에 일본은 ‘한일의정서’ 의 체결을 강요하고서 조선 조정에 이범진의 본국 소환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강요에 못 이긴 고종은 5월 18일에 러시아 상주 공사관의 폐쇄와 함께 이범진을 소환을 명령한다. 하지만 고종은 이범진에게 밀서를 보내 ‘일본의 압박에 의한 귀환 명령을 무시하고 러시아에 남을 것”을 지시한다. 이 따라 이범진은 아들 이위종과 함께 공사관이 폐쇄되는 1906년 초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이범진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1906년 헤이그 특사를 지원한 것이다. 고종은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1907년 6월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될 때, 이상설.,이준, 등 특사를 밀파하여 열강을 상대로 구국외교를 펼치게 한 것이다. 이범진은 특사단을 지원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이범진은 외국어에 능통한 자신의 둘째 아들 이위종을 특사단의 일원으로 동행하게 하였다. 당시 영어, 불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던 이위종은 특사들이 헤이그에 도착한 뒤 한국의 입장과 처지를 폭로하는 활동을 벌일 때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하지만 이범진이 기대를 걸었던 헤이그 특사활동도 별 다른 성과를 거두지 거두지 못하고 만다.
이후 이범진이 주력한 것은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활발하게 전개되던 독립운동이었다. 연해주는 1860년대 이래 대규모 한인사회가 형성되고 있었고 특히 울사늑약(乙巳勒約) 체결 이후 민족 지도자들이 대규모로 유입되어 독립운동을 위한 새로운 무대로 떠오르고 있었다. 이범진은 연해주 한인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1908년 봄 연해주에서 최재형과 이범윤 등이 의병단체인 동의회 를 편성할 때 아들 이위종을 파견하여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도록 하였다. 아들 이위종이 연해주를 방문했을 때 이범진은 당시 매우 큰 금액인 1만 루블을 군자금으로 보냈다
이범진은 1910년 8월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아 번민하다가 조선 선비들이 역사적 책임을 통감할 때 결행하곤 했던 방식에 따라 1911년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殉國)하였다. 그는 순국하기 전에 남은 유산을 미국과 연해주의 각지의 독립운동자금으로 나누어 보내주도록 조치해 마지막까지 독립을 향한 자신의 염원을 드러내었다.
이범진의 구국외교활동의 현재적 의미
19세기말에서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는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발생했던 아관파천(俄館播遷), 러·일전쟁, 포츠머스 강화회의, 헤이그만국평화회의 및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과 이후 독립운동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적 현장에는 항상 이범진이 있었다. 그는 러시아를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독립 유지와 한반도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외교 활동 및 해외 언론 활동을 전개했다
대한제국의 독립유지와 안전보장이라는 100년 전의 과제는 현재 시점에서도 대한민국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정책적 과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기울어가는 조선의 독립유지와 안전보장을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던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 이범진의 삶은 현재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큰 교훈을 던져주고 있다.
19세기 중국중심의 동아시아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가 태동하는 상황에서 한반도가 주변 강대국들의 각축장이 되어 갔던 상황은 지금 시기 미국중심의 단극세계체제가 다극세계체제로 재편되고 있는 시대적 상황에 놓여 있는 한반도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동북아 안전보장체계 수립을 목표로 했던 근대 한러관계는 지금에 와서 비록 굴절된 모습이지만 북한과 러시아와의 급속한 정치군사적 밀착 상황에 대해서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한러관계의 역사적 특징은 한국과 러시아는 접경국가로서 관계증진을 위한 상호노력을 기울였으나 주변 열강들과의 이해관계와 역학관계에 따라 관계발전이 저해되거나 단절되는 경험을 가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지금에 와서 2022년 우크라이나사태 발발 이후에 한국이 미국 서방의 제재에 참여함으로써 급속히 냉각되어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는 한러관계에서도 다시 반복 재현되고 있다.
이범진이 활약하던 망국(亡國)의 시기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던 한국의 안전보장과 독립회복이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판단한다면 이범진의 활동과 러시아의 한반도 개입정책이 가지는 현재적 의미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범진의 외교활동과 대한제국의 대러시아 외교정책의 역사적 경험은 또 다시 격변의 시기를 맞이하는 동북아에서 한국의 대러시아 외교정책의 나침반 역할을 충실히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원로한국사학자 유리 바닌 교수는 예전에 필자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들려 준 적이 있다. 이것으로 짧은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러시아가 특별히 한국을 위해서 대 동북아정책을 펼친 것은 아니다. 러시아는 자신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역사상 러시아의 정책은 한국에 이익이 되는 점들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은 러시아에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글 김원일 | 정치학박사, 모스크바시립대 교수
글로벌웹진 NEWSROH 칼럼 ‘김원일의 모스크바 뉴스’
http://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kwil&page=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