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스님생가-용봉사-윤봉길의사기념관 참배
이창희 동국대교수 89차 월례강좌도 현장 진행 호평
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조계종단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태효스님 이하 민추본)가 만해 한용운스님(1879-1944)과 매헌 윤봉길의사(1908-1932)의 구국혼을 돌아보는 광복 80주년 기념 평화순례를 12일 진행했다.
민추본 89차 월례강좌를 겸한 이번 평화순례는 ‘항거와 독립, 광복과 분단,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주제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두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백제사찰 용봉사(龍鳳寺)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민추본 사무총장 덕유스님(용흥사 주지)과 집행위원 지현스님을 비롯, 김인철, 윤상복 거사, 조미애, 신순회 행정관 등 30여명의 순례단은 이른 아침 조계사 앞을 출발, 충남 홍성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가터와 만해문학체험관에 먼저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불교개혁 운동가로 큰 발자취를 남긴 만해의 생가터엔 작은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고 ‘금문(禁門)’의 현판이 인상적인 사당 만해사(卍海祠)가 자리하고 있다. 순례단은 참배후 시비(詩碑) 공원과 만해문학관을 방문, 한용운 스님의 생애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코스는 충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봉산(龍鳳山)의 용봉사(주지 정준스님)였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용봉사는 18세기 후반 폐사의 아픔을 겪었으나 1980년 무렵 중창(重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입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있고 정상 부근 옛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1997년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의 영산회 괘불탱(1690년 조성)도 용봉사의 자랑거리다.


용봉사 주지 정준스님은 순례단 불자들에게 “돌려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무엇을 줄 것 인가 고민하시라. 멀리 있는 사람한테 좋은 것 주려고 하지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 하는 것이 살아서도 극락, 돌아가실때도 극락이지 않을까 싶다”는 덕담을 들려주었다.
민추본 사무총장 덕유스님은 “용봉산의 산세와 용봉사의 기운이 수덕사 인근 사찰 이상의 느낌을 주는 곳이다. 오늘 주지스님과 함께 민추본의 순례지로 참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지현스님도 “저는 가끔씩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뭉클뭉클할 때가 있다. 민초들에 의해 지켜지는 나라가 아닌가. 신앙심을 가지고 지도를해주신 많은 스님 감사하고이런 자리를 통해 내일도 건강한 자신을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순례단의 마지막 행선지는 예산에 위치한 윤봉길의사기념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세계를 놀라게 한 의거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본격적인 무장독립 투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엔 그이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들이 65점의 보물로 지정,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전면에 윤의사의 흉상과 함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명한 어록이 새겨진 벽이 보인다.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윤의사가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며 남긴 결의에 찬 말이다.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 의거후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향년 24세로 순국(殉國)했다. 처형 이후 일제는 은밀히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 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 등의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공동묘지 통행로에서 발굴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조계사에 안치된후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순례단의 묘각성 보살은 “불과 스물다섯 나이에 상해의거를 결행한 윤봉길 의사는 단지 한분의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세계역사를 바꾼 상해의거는 물론, 한학과 문학의 조예(造詣)가 남달랐고 농민계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큰 감명을 받았다”고 소회를 말했다.
이날 평화순례에서는 이창희 동국대 교수(민추본 정책기획위원)의 현장 강의도 돋보였다. 이창희 교수는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과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독립투쟁과 불교 행적을 중심으로, 민중중심의 항일독립운동에 불교계가 미친 영향을 소개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창희 교수는 “불교계는 구한말 사회의 개혁을 위해 적지않게 진보적 역할을 했다. 개화파에 동학에 영향을 미쳤고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의 시신을 수습(收拾)한 주인공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을 가져온 경허스님이다. 또한 홍범도장군은 1890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한 이후 을미의병(1895)을 계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3.1운동이후 불교계는 김법린 김성숙 등이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용성스님 만해스님 백초월 스님 등이 군자금을 모아 보냈다”고 소개했다.
또한 “윤봉길 의사는 불교계가 임시정부에 파견했다는 이야기가 있을만큼 불교와의 인연이 깊고 상해 홍구공원 의거이후 심문과정에서 종교를 불교로 당당히 밝힌 바 있다. 훗날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조계사에 안치한 것도 그런 연유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일제가 항일 전통이 살아있는 한국불교를 포섭하기 위해 각종 회유책으로 친일화를 획책(劃策)했지만 용성스님과 만해스님 등이 분연히 맞서 싸웠다. 불경한글화사업에 주력하여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1921년)하고 31개 교구본사를 총괄하는 총본산 건립운동을 추진, 1938년 태고사(현 조계사)가 건립되었으며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도 적극 전개했다”고 평가했다.
이창희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3.1운동 당시 용성스님이 대한민국 국호를 처음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군주의 나라 대한제국이 아니라 3.1운동으로 촉발된 민의 나라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했다. ‘민주공화제’가 1920년 유럽의 체코와 오스트리아 헌법, 1925년 중국헌법에 나타난 것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 민주공화제가 세계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지난 겨울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들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정진하자”고 당부해 박수를 받았다.

민추본 조미애 행정관은 “이번 평화순례를 통해 수많은 선열(先烈)이 힘겹게 지켜온 나라, 광복과 동시에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를 돌아봤으면 한다. 왜 우리가 번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소모하고 왜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지 못하는지, 적대와 분단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화합과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마무리 발언으로 순례의 대미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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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조계종 민추본, 백두산 북중접경지역 평화순례 시작 (2024.8.29.)
3박4일간 항일전적지 돌아봐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m0604&wr_id=12213
한용운스님생가-용봉사-윤봉길의사기념관 참배
이창희 동국대교수 89차 월례강좌도 현장 진행 호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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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단 민족공동체추진본부(본부장 태효스님 이하 민추본)가 만해 한용운스님(1879-1944)과 매헌 윤봉길의사(1908-1932)의 구국혼을 돌아보는 광복 80주년 기념 평화순례를 12일 진행했다.
민추본 89차 월례강좌를 겸한 이번 평화순례는 ‘항거와 독립, 광복과 분단, 그리고 평화와 통일’의 주제로 민족사에 길이 남을 두 분의 독립운동가를 기리고 백제사찰 용봉사(龍鳳寺)도 탐방하는 시간을 가졌다.
민추본 사무총장 덕유스님(용흥사 주지)과 집행위원 지현스님을 비롯, 김인철, 윤상복 거사, 조미애, 신순회 행정관 등 30여명의 순례단은 이른 아침 조계사 앞을 출발, 충남 홍성에 위치한 만해 한용운 스님의 생가터와 만해문학체험관에 먼저 도착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시인, 불교개혁 운동가로 큰 발자취를 남긴 만해의 생가터엔 작은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고 ‘금문(禁門)’의 현판이 인상적인 사당 만해사(卍海祠)가 자리하고 있다. 순례단은 참배후 시비(詩碑) 공원과 만해문학관을 방문, 한용운 스님의 생애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두 번째 코스는 충남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용봉산(龍鳳山)의 용봉사(주지 정준스님)였다. 백제 말기에 창건된 용봉사는 18세기 후반 폐사의 아픔을 겪었으나 1980년 무렵 중창(重創)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절 입구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마애불이 있고 정상 부근 옛터에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마애여래입상이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고 있다. 1997년 보물로 지정된 극락전의 영산회 괘불탱(1690년 조성)도 용봉사의 자랑거리다.
용봉사 주지 정준스님은 순례단 불자들에게 “돌려받을 생각하지 마시고 무엇을 줄 것 인가 고민하시라. 멀리 있는 사람한테 좋은 것 주려고 하지말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게 잘 하는 것이 살아서도 극락, 돌아가실때도 극락이지 않을까 싶다”는 덕담을 들려주었다.
민추본 사무총장 덕유스님은 “용봉산의 산세와 용봉사의 기운이 수덕사 인근 사찰 이상의 느낌을 주는 곳이다. 오늘 주지스님과 함께 민추본의 순례지로 참 좋은 시간이 되었다”고 말했다.
지현스님도 “저는 가끔씩 우리나라를 생각하면 뭉클뭉클할 때가 있다. 민초들에 의해 지켜지는 나라가 아닌가. 신앙심을 가지고 지도를해주신 많은 스님 감사하고이런 자리를 통해 내일도 건강한 자신을 만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순례단의 마지막 행선지는 예산에 위치한 윤봉길의사기념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 일왕의 생일 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세계를 놀라게 한 의거는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널리 알리고, 본격적인 무장독립 투쟁의 계기를 만들었다.
윤봉길의사기념관엔 그이의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여러 유물들이 65점의 보물로 지정, 전시되고 있다. 기념관을 들어서면 전면에 윤의사의 흉상과 함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장부가 집을 나서면 살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유명한 어록이 새겨진 벽이 보인다. 농촌계몽운동을 펼치던 윤의사가 독립운동의 길로 나서며 남긴 결의에 찬 말이다.
윤봉길 의사는 홍구공원 의거후 일본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1932년 12월 19일 향년 24세로 순국(殉國)했다. 처형 이후 일제는 은밀히 쓰레기 소각장이었던 노다 산 공동묘지 관리소로 가는 좁은 길목에 사람들이 밟고 가도록 암매장했다. 광복 이후 김구 선생 등의 노력으로 1946년 3월 6일 공동묘지 통행로에서 발굴된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조국으로 돌아와 서울 조계사에 안치된후 효창공원 3의사 묘역에 안장됐다.
순례단의 묘각성 보살은 “불과 스물다섯 나이에 상해의거를 결행한 윤봉길 의사는 단지 한분의 독립운동가가 아니었다. 세계역사를 바꾼 상해의거는 물론, 한학과 문학의 조예(造詣)가 남달랐고 농민계몽운동에 헌신한 위대한 선각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큰 감명을 받았다”고 소회를 말했다.
이날 평화순례에서는 이창희 동국대 교수(민추본 정책기획위원)의 현장 강의도 돋보였다. 이창희 교수는 만해(卍海) 한용운 스님과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의 독립투쟁과 불교 행적을 중심으로, 민중중심의 항일독립운동에 불교계가 미친 영향을 소개해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이창희 교수는 “불교계는 구한말 사회의 개혁을 위해 적지않게 진보적 역할을 했다. 개화파에 동학에 영향을 미쳤고 동학농민운동 지도자 전봉준의 시신을 수습(收拾)한 주인공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을 가져온 경허스님이다. 또한 홍범도장군은 1890년 금강산 신계사에서 출가한 이후 을미의병(1895)을 계기로 항일투쟁에 나섰다. 3.1운동이후 불교계는 김법린 김성숙 등이 임시정부 수립에 기여하고 용성스님 만해스님 백초월 스님 등이 군자금을 모아 보냈다”고 소개했다.
또한 “윤봉길 의사는 불교계가 임시정부에 파견했다는 이야기가 있을만큼 불교와의 인연이 깊고 상해 홍구공원 의거이후 심문과정에서 종교를 불교로 당당히 밝힌 바 있다. 훗날 유해를 수습하여 서울 조계사에 안치한 것도 그런 연유다”라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일제가 항일 전통이 살아있는 한국불교를 포섭하기 위해 각종 회유책으로 친일화를 획책(劃策)했지만 용성스님과 만해스님 등이 분연히 맞서 싸웠다. 불경한글화사업에 주력하여 한글판 금강경을 출간(1921년)하고 31개 교구본사를 총괄하는 총본산 건립운동을 추진, 1938년 태고사(현 조계사)가 건립되었으며 1940년 창씨개명 반대운동도 적극 전개했다”고 평가했다.
이창희 교수는 “최근 독립운동사 연구에서 3.1운동 당시 용성스님이 대한민국 국호를 처음 제시했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군주의 나라 대한제국이 아니라 3.1운동으로 촉발된 민의 나라 대한민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서 열린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제정된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선포했다. ‘민주공화제’가 1920년 유럽의 체코와 오스트리아 헌법, 1925년 중국헌법에 나타난 것을 고려할 때 대한민국 민주공화제가 세계를 선도했다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고 지난 겨울 대통령 탄핵과정에서 보여준 우리 국민들의 놀라운 민주주의 회복력을 바탕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데 정진하자”고 당부해 박수를 받았다.
민추본 조미애 행정관은 “이번 평화순례를 통해 수많은 선열(先烈)이 힘겹게 지켜온 나라, 광복과 동시에 분단으로 이어진 역사를 돌아봤으면 한다. 왜 우리가 번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소모하고 왜 젊은이들에게 희망과 비전을 주지 못하는지, 적대와 분단을 치열하게 고민하고 화합과 평화를 위해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마무리 발언으로 순례의 대미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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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뉴스>
조계종 민추본, 백두산 북중접경지역 평화순례 시작 (2024.8.29.)
3박4일간 항일전적지 돌아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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