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sroh=륜광輪光 newsroh@gmail.com
대구 도심 한복판, 지도 위에서 오랫동안 ‘무채색의 공백(空白)’으로 존재하던 곳이 있다. 높은 철조망과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구 시민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곳. 바로 캠프워커(Camp Walker)와 캠프 헨리(Camp Henry)를 비롯한 대구 미군기지 일대다.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이곳은 국가 보안과 군사적 필요라는 명분 아래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이 침묵의 공간에는 단순한 폐쇄의 역사를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애환(哀歡)과 저항의 서사(敍事)가 켜켜이 쌓여 있다. 30년 기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현장을 누볐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역사의 뒤편에 감춰져 있던 ‘살아있는 화석’ 같은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벅찬 감동이다.
1916년, 제국주의의 발톱이 박히다
이 땅의 비극은 1916년 4월, 일제강점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구 남구 북천동 일대 장대거리 인근에는 일본 육군 보병 80연대가 주둔하며 식민 지배의 거점(據點)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는 이른바 '군부대 유치 운동'을 명분 삼아 조선의 땅을 야금야금 집어삼켰고, 영남권을 총괄하는 80연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연대장의 숙소는 건들바위 인근에 위치했으며, 이들은 조선인들의 저항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부대 주변에 인공 도랑을 파고 철조망을 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억압적이었던 군사 공간은 해방 이후에도 미군이 그대로 이어받아 캠프 스킵워스(Camp Skipworth)로, 다시 캠프워커와 캠프 헨리로 이름을 바꾸며 100년이라는 기나긴 ‘금단(禁斷)의 시간’을 이어가게 된다.
1941년, 차가운 벽을 뚫은 저항의 함성
이 부지의 역사는 단지 일제의 군사력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땅의 서늘한 기운을 뚫고, 뜨거운 독립의 의지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1941년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어두운 시기였으나, 대구에서는 꺼지지 않는 항일(抗日)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이곳 인근의 엄혹한 감시망 속에서도 항일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이 땅의 담장 너머에서 제국주의의 상징을 보며, 굴복 대신 투쟁을 선택했다.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는 단순한 학내 모임을 넘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의 희망을 잇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100년의 금단 구역이었던 이곳은, 일제에겐 통치의 상징이었으나 우리에겐 꺾이지 않는 저항의 증거가 서린 ‘성지(聖地)’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워진 비석, 다시 새긴 주권
캠프 헨리 부지 내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과 희망이 교차하는 상징물이 하나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80연대가 일왕(日王)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맹세비(일왕 군인칙유 기념탑)였다. 이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가장 치욕적인 장치였다.
해방 이후,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오덕준 중령은 그 치욕스러운 비석을 마주하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그라인더를 가져와 맹세비의 표면을 거칠게 갈아내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기고 돌가루가 날리는 동안, 충성 맹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덕준 중령은 그 자리에 다시 3.1운동 31주년을 기념하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간적 전유(Spatial Appropriation)’다. 일제가 조선의 땅을 군사적 목적으로 무단 점유하고 그들만의 사상을 강제했던 ‘공간의 폭력’을,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항 정신으로 완전히 덮어씌운 것이다. 비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제국주의의 굴종에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해방과 냉전, 공간주권의 상실
1945년 해방은 찾아왔지만, 이 땅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즉각 얻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난 그 자리를 이번에는 미군이 차지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이 대구에 진주(進駐)하면서 이 일대는 미군 부지로 징발되었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과 냉전 체제가 심화되면서, 이곳은 더 강력하고 견고한 철조망에 갇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공간주권(Spatial Sovereignty)’이라는 묵직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주권국가로서 땅을 온전히 관리하지 못하고, 타국 군대의 주둔을 위해 도시 한가운데를 비워줘야 했던 냉전 시대의 비극이다. 100년 동안 이어진 이 ‘공간의 점유’는 대구 남구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도시는 비대칭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주권 회복의 지난한 여정
반환의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다.
2002년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을 통해 캠프워커 헬기장(H-805) 및 동편 활주로 일부 반환(返還) 논의가 시작되었다. 2014년~2019년엔 대구시가 부지 매입비를 납부하고 대체 시설 이전 공사를 추진하며 반환을 위한 행정적, 물리적 토대를 쌓았다.
2020년 말 SOFA 합동위원회를 통해 최종 즉시 반환이 합의되었고 3년간의 토양 오염 정화 및 문화재 조사를 거쳐 마침내 2024년 대구시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되었다.
이 긴 여정은 대구 시민들이 스스로의 땅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간절히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3차 순환도로 미연결 구간의 완전한 개통은 단순한 도로 건설이 아닌, 단절되었던 도심의 혈관을 잇는 ‘주권 회복’의 상징적 사건이다.

대구의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제 굳게 닫혔던 캠프워커의 문이 열리고, 그 자리에 대구의 미래를 품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70년 동안 끊어졌던 3차 순환도로가 마침내 하나로 연결되는 모습은 대구 시민들이 수십 년간 염원해 온 ‘도심 혈관의 복원(復元)’ 그 자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 금단의 땅이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문화 공간으로 환골탈태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미군 기지의 벽을 허문 자리에는 최첨단 기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대구도서관이 들어서 미래 세대에게 지혜를 전하고, 넓게 펼쳐진 대구평화공원은 도심 속 푸른 숲이 되어 시민들의 지친 숨결을 달래줄 것이다.
70년의 단절(斷絶), 100년의 금기(禁忌)를 넘어 이 땅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은 단순한 부지 반환이 아니다. 일제의 억압과 냉전의 긴장 속에서 멈춰 섰던 대구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그 위에 평화와 문화를 쌓아 올린 이 놀라운 변신은, 우리 시대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대구는 그 굳게 닫혔던 철문을 활짝 열고, 시민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가득한 새로운 100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대구의 심장이, 진정한 우리들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원문 제공 전국진 이코노미21 대구경북본부장 (100년만에 열리는 대구 금단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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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도심 한복판, 지도 위에서 오랫동안 ‘무채색의 공백(空白)’으로 존재하던 곳이 있다. 높은 철조망과 견고한 벽에 가로막혀,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대구 시민 누구도 알 수 없었던 곳. 바로 캠프워커(Camp Walker)와 캠프 헨리(Camp Henry)를 비롯한 대구 미군기지 일대다. 지난 100년의 세월 동안 이곳은 국가 보안과 군사적 필요라는 명분 아래 철저히 외부와 단절되어 있었다.
이 침묵의 공간에는 단순한 폐쇄의 역사를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애환(哀歡)과 저항의 서사(敍事)가 켜켜이 쌓여 있다. 30년 기자 생활을 하며 수많은 현장을 누볐지만, 이토록 오랫동안 역사의 뒤편에 감춰져 있던 ‘살아있는 화석’ 같은 공간을 마주하는 것은 벅찬 감동이다.
1916년, 제국주의의 발톱이 박히다
이 땅의 비극은 1916년 4월, 일제강점기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대구 남구 북천동 일대 장대거리 인근에는 일본 육군 보병 80연대가 주둔하며 식민 지배의 거점(據點)으로 자리 잡았다. 일제는 이른바 '군부대 유치 운동'을 명분 삼아 조선의 땅을 야금야금 집어삼켰고, 영남권을 총괄하는 80연대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당시 연대장의 숙소는 건들바위 인근에 위치했으며, 이들은 조선인들의 저항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부대 주변에 인공 도랑을 파고 철조망을 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토록 억압적이었던 군사 공간은 해방 이후에도 미군이 그대로 이어받아 캠프 스킵워스(Camp Skipworth)로, 다시 캠프워커와 캠프 헨리로 이름을 바꾸며 100년이라는 기나긴 ‘금단(禁斷)의 시간’을 이어가게 된다.
1941년, 차가운 벽을 뚫은 저항의 함성
이 부지의 역사는 단지 일제의 군사력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바로 그 땅의 서늘한 기운을 뚫고, 뜨거운 독립의 의지가 피어오르기도 했다. 1941년은 우리 민족에게 가장 어두운 시기였으나, 대구에서는 꺼지지 않는 항일(抗日)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대구사범학교 학생들은 이곳 인근의 엄혹한 감시망 속에서도 항일비밀결사대를 조직했다.
그들은 이 땅의 담장 너머에서 제국주의의 상징을 보며, 굴복 대신 투쟁을 선택했다. 학생들이 조직한 비밀결사대는 단순한 학내 모임을 넘어, 민족의 정신을 일깨우고 독립의 희망을 잇는 거대한 흐름이었다. 100년의 금단 구역이었던 이곳은, 일제에겐 통치의 상징이었으나 우리에겐 꺾이지 않는 저항의 증거가 서린 ‘성지(聖地)’이기도 했던 것이다.
지워진 비석, 다시 새긴 주권
캠프 헨리 부지 내에는 우리 역사의 비극과 희망이 교차하는 상징물이 하나 있다. 원래 이 자리에 세워져 있던 비석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군 80연대가 일왕(日王)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맹세비(일왕 군인칙유 기념탑)였다. 이는 식민지 백성들에게 굴종을 강요하는 가장 치욕적인 장치였다.
해방 이후, 당시 이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오덕준 중령은 그 치욕스러운 비석을 마주하고 결단을 내렸다. 그는 그라인더를 가져와 맹세비의 표면을 거칠게 갈아내기 시작했다. 불꽃이 튀기고 돌가루가 날리는 동안, 충성 맹세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오덕준 중령은 그 자리에 다시 3.1운동 31주년을 기념하는 문구를 새겨 넣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간적 전유(Spatial Appropriation)’다. 일제가 조선의 땅을 군사적 목적으로 무단 점유하고 그들만의 사상을 강제했던 ‘공간의 폭력’을,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항 정신으로 완전히 덮어씌운 것이다. 비석은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지만, 그 안에 담긴 정신은 제국주의의 굴종에서 민족의 자유와 독립으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해방과 냉전, 공간주권의 상실
1945년 해방은 찾아왔지만, 이 땅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즉각 얻지 못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물러난 그 자리를 이번에는 미군이 차지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미군이 대구에 진주(進駐)하면서 이 일대는 미군 부지로 징발되었다.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과 냉전 체제가 심화되면서, 이곳은 더 강력하고 견고한 철조망에 갇히게 되었다.
이 과정은 우리에게 ‘공간주권(Spatial Sovereignty)’이라는 묵직한 화두(話頭)를 던진다. 주권국가로서 땅을 온전히 관리하지 못하고, 타국 군대의 주둔을 위해 도시 한가운데를 비워줘야 했던 냉전 시대의 비극이다. 100년 동안 이어진 이 ‘공간의 점유’는 대구 남구 주민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도시는 비대칭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주권 회복의 지난한 여정
반환의 역사는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되었다.
2002년 한·미 연합토지관리계획(LPP) 협정을 통해 캠프워커 헬기장(H-805) 및 동편 활주로 일부 반환(返還) 논의가 시작되었다. 2014년~2019년엔 대구시가 부지 매입비를 납부하고 대체 시설 이전 공사를 추진하며 반환을 위한 행정적, 물리적 토대를 쌓았다.
2020년 말 SOFA 합동위원회를 통해 최종 즉시 반환이 합의되었고 3년간의 토양 오염 정화 및 문화재 조사를 거쳐 마침내 2024년 대구시로 소유권 이전 등기가 완료되었다.
이 긴 여정은 대구 시민들이 스스로의 땅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간절히 노력했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3차 순환도로 미연결 구간의 완전한 개통은 단순한 도로 건설이 아닌, 단절되었던 도심의 혈관을 잇는 ‘주권 회복’의 상징적 사건이다.
대구의 새로운 드라마가 시작된다
이제 굳게 닫혔던 캠프워커의 문이 열리고, 그 자리에 대구의 미래를 품은 드라마가 펼쳐진다. 70년 동안 끊어졌던 3차 순환도로가 마침내 하나로 연결되는 모습은 대구 시민들이 수십 년간 염원해 온 ‘도심 혈관의 복원(復元)’ 그 자체다.
더욱 감동적인 것은 이 금단의 땅이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할 문화 공간으로 환골탈태한다는 점이다. 거대한 미군 기지의 벽을 허문 자리에는 최첨단 기술과 자연이 어우러진 대구도서관이 들어서 미래 세대에게 지혜를 전하고, 넓게 펼쳐진 대구평화공원은 도심 속 푸른 숲이 되어 시민들의 지친 숨결을 달래줄 것이다.
70년의 단절(斷絶), 100년의 금기(禁忌)를 넘어 이 땅이 우리 품으로 돌아온 것은 단순한 부지 반환이 아니다. 일제의 억압과 냉전의 긴장 속에서 멈춰 섰던 대구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의 상처를 지우고 그 위에 평화와 문화를 쌓아 올린 이 놀라운 변신은, 우리 시대가 거둔 가장 위대한 승리 중 하나로 기록될 것이다. 이제 대구는 그 굳게 닫혔던 철문을 활짝 열고, 시민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가득한 새로운 100년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고 있다. 대구의 심장이, 진정한 우리들의 심장이 다시 뜨겁게 뛰기 시작했다.
원문 제공 전국진 이코노미21 대구경북본부장 (100년만에 열리는 대구 금단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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