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덧 인도 성지 순례를 시작한지 12일째가 되었다. 이제는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처음엔 이렇게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게 쉽지 않았지만 점점 익숙해져가고 성지순례는 거의 마무리가 되고 있다. 새벽 예불(禮佛)과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우리 순례단이 방문한곳은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고대 코살라국의 수도인 쉬라바스티(사위성) 에 머물며 기원정사를 세운 수닷타 장자탑, 앙굴리말라탑,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시며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코살라국은 강한 군사력으로 한때 번영을 이룬 나라였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려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부처님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 이곳 쉬라바스티(사위성)에 첫 발을 디딘 후 이곳은 부처님의 중요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부처님의 45년간 교화 여정 중 이곳 사위성에서 24안거를 보냈는데 그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머물 정도로 매우 사랑한 곳이라고 한다.
아침 8시20분쯤 수닷타 탑터에 도착하여 탑돌이와 참배를 하고 자리에 앉아 스님은 사위성에서 천하의 살인자였던 앙굴리 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과정을 설명 해 주셨다.

쉬라바스티의 부유한집 출신인 앙굴리 말라는 어릴적 인도의 북쪽인 그당시 문명이 발달한 탁실라라는 곳에 위대한 스승에게 어린 아들을 유학보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스승이 더이상 가르칠게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앙굴리 말라는 안가겠다 더 배우겠다고 하고 스승은 가라고 하는 와중에 스승은 굳이 한가지 더 배울게 있긴한데 그건 행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에 앙굴리 말라는 두세번 더 간청을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행하겠다고 매달리니 스승이 수행법을 알려주기를 '백 명의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라. 백명의 사람들 죽여 천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염주를 목에 걸면 그 즉시 승천한다. 이 몸 그대로 하늘 나라에 바로 태어나게 되느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의혹을 가질법도 한데 여러번 약속한 앙굴리 말라는 그대로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후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여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사람을 죽이니 소문은 빠르게 퍼져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가 더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고향으로 돌아오며 살인을 했고 이 사실이 쉬라바스티까지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당시의 왕 빠세나디는 살인자를 잡으려 군대를 동원하는 등 당시 사회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소식을 들은 앙굴리 말라의 어머니는 부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 호소를 하기까지 했다. 부처님은 어머니의 청을 듣고 피하라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한채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며 천천히 앙굴리 말라가 오는 쪽으로 걸어가자 얼마지 않아 칼과 방배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와도 부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 지지 않자 '사문아. 거기 섰거라'하며 고함을 지르며 '왜 서라는데 안서느냐?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하고 화를 내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래는 멈춘 지 오래 되었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앙굴리말라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부처님이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멈춘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너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대답을 하니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꿈에서 깨듯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의 악행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어찌할지 여쭈었다. 이렇게 해서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려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설법을 듣고 사람이 어리석은 신념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조차 인지 못하는 강력한 세뇌(洗腦)가 되어 한평생을 그 족쇄에 스스로를 가두며 자신과 타인 더 나아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사이비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인 진실이 아닌 하나의 관점일 수 있다는 태도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체 만물이 고정된 실체나 불변하는 자아 없이 서로 연결 되어있다는 부처님의 공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이곳은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고, 밝고 안온하며 차분한 분위기 였다. 12세기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된 후, 1863년 영국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發掘)되었는데 현재는 건물의 벽돌 기초와 옛 승방 터 대강당만 남아있고, 유적지 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 얻은 보드가야 보리수의 묘목을 아난다 존자가 심었다고 존해지는 특별한 보리수도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앙굴라말라 탑돌이를 한뒤 탁발을 해서 기원정사를 향해 '환지본처'하였다. 기원정사로 향하는 길에 천축선원 대인스님께서 준비한 공양물을 탁발하여 각자의 발우에 받고 2,600년전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했던 것처럼 우리 순례단도 수행의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다. 음식을 담은 발우를 두손으로 소중히 들고 염불을 하며 걸어서 기원정사(祇園精舍)까지 왔다.
경내를 한바퀴 돈 후 모두 한자리에 앉아 예참 공양을 올린 후 스님은 기원정사 창건 유래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말씀이 끝나자 순례자들은 탁발해온 음식을 자리에 앉아 공양했다. 발우에 담긴 음식을 정성껏 하나하나 되새기며 천천히 먹었다. 흔히 밥먹는 시간이면 서로 얘기를 나누며 먹는게 일상이라면 이곳에서 먹는 음식은 수행하는 것처럼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해서 숭고한 마음으로 먹었던것 같다. 부처님과 제자들도 이렇게 조용하게 집중하며 공양을 했을것 같다.

기원정사 (제타바타가)
이어서 경전 독송과 명상 후 기원정사에서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져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직접 걷고 느끼며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낸후 다시 모여 '절의 참뜻'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정사'나 '도량'이라 불리는 곳은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세속의 눈으로 보면 시체를 버리는 숲은 가장 부정하고 더러운 장소지만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곳은 성소(聖所)가 된 것이다. 같은 땅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장 부정한 곳이 될 수도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될수도 있다. 그래서 본래 성스럽다 할것도, 부정하다 할것도 없다 하여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한다.

아리조나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조윤희작가(오른쪽)와 함께
이 기원정사가 세상에서 가장 청정하고 성스러운 곳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곳에서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아 마음을 고요히 지혜를 증득해 밝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지금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할까? 먼저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것이 수행의 출발이나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낳고, 환경 위기를 초래 하며,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개인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 그리고 사회정의를 함께 세워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설명 해 주셨다. 새로운 시대에는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보다 여럿이 어울려 하나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바로 '모자이크 붓다'라고 한다.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지순례의 또다른 의미는 검소하게 먹고, 입고, 자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데 있다. 이제 우리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그 능력을 자기파괴에 쓰지 말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쓰자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해 주셨다.
그리고 특별히 이날 우리가 묵을 숙소 천축선원(天竺禪院)으로 돌아가면 공양 전까지 장이 열린다고 한다. 스탭들이 장을 봐뒀는데 개인당 오렌지 2개, 바나나 2개, 구아바 1개, 토마토 2개, 당근 2개 그리고 파파야와 양배추는 조별로 1개씩이라고 하니 모두들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먹은 과일들은 정말 특별했다. 맛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음식이었던지 그렇게 감사히 소중히 먹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순례단은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잠자리에 부지런히 들었다.

천축선원
다음날은 새벽 1시30분쯤 기상하여 짐을 싸서 2시30 상카시아 탑터로 출발했다. 상카시아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위치한 곳으로 불교8대 성지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붓다의 부족인 석가족이 코살라국의 침략을 피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현대에도 많은 석가족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아소카왕이 이곳에 많은 스투파와 대규모 사원을 건립하였으나 불교 유적의 흔적은 없고, 불교 유적지로 추정되는 허물어진 탑 위에 힌두 사원을 세워 링가를 모시고 있다. 지금은 석가족의 후예로 '샤카'라는 성을 가진 불교인들이 이 지역에 아직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을 때에도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사람들로 상카시아 근방 '이따와'란 도시에서 2천 명 정도의 회원을 가진 '불교 청년회'를 조직해 활동 중이다.

상카시아에서 스님의 법문에 귀기울이는 불자들
이곳 상카시아는 부처님의 일생과 직접적인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고 한다. 상카시아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설법을 해 드리고 다시 내려오셨다는 설화가 대표적이다.
불교 4대 성지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도를 이루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곳이라는점, 나머지 4곳 중 3곳은 부처님께서 교화활동을 많이 하신 지역이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상카시아에 얽힌 이야기는 다소 신화적이고 신비적 현상을 중심으로 중요 성지로 선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라즈기르는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 무릎꿇은 이야기, 쉬라바스티는 천불화현으로,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공양한 이야기로, 이곳 상카시아는 도리천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걸 보면 네곳 모두 어떤 신비한 현상을 중심으로 선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카시아의 설화를 보면 인도든 한국이든 부모를 존중하고 조상을 섬기는 문화가 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수행자가 집떠나 출가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큰 불효로 여겨질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해도 부모를 가슴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특히 조상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 출가는 완전히 불효막심(不孝莫甚) 한 일인 것이다. 이에 반해 인도는 조상섬기는 문화는 있지만 출가를 불효로 취급하는 문화는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부모에 대한 죄책감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카시아의 설화의 의미는 세속에서 부모를 편히 모시는 것보다 부모를 깨닫게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리라.
상카시아의 모습은 교통이 다소 불편하고 번화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일반 관관객 보다는 순례자들이 주로 찾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다. 대규모 사원이 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터만 남아있고, 한적한 시골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다음 장소 담마센터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석가족이 싱싱한 꽃으로 직접 만든 꽃목걸이를 들고 순례단 한명한명의 목에 걸어주고 맨앞 스님이 걷는 길 앞에 꽃잎을 뿌려주는 등 최고의 환대를 해 주었다.

순례단이 자리에 착석하자 무대앞에 석가족의 환영식이 시작되었다. 깐노즈, 이타와, 깐푸르, 메인뿌리, 에타 등 각지에서 온 석가족 약 200여명이 스님과 순례단을 맞아 주었다. 한명한명이 스님께 예를 갖추고난 뒤 학생들이 준비한 소박한 공연이 이어졌다. 스님께서 감사 인사말씀을 전해 주시고, 환영식이 마무리 되었다. 이후 제 35차 성지순례 회향식이 시작되었다.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로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면 인도에서 불교가 다시 꽃필 수 있을지', '자꾸 물러서는 마음이 올라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순례를 다녔는데 이 고생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 고생을 고생으로만 여기는 마음으로 순례를 마치면 손해만 보게 되지만 그걸 극복한 경험으로 남기면 그건 내인생의 큰 자산이 된다. 이번 성지 순례가 모두에게 그런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함께 하신 분들의 인사말씀이 이어졌고, 스님의 안내로 가사와 발우를 반납하는 의식이 진행 되었다. 가사를 입고 삼배를 올린뒤 이어 가사를 벗어 가지런히 접고, 무릎을 꿇은 채 가사 위에 발우를 얹어 눈높이로 들고 "가사와 발우를 부처님께 바칩니다" "다음에 또 출가 하겠습니다" 라고 외친후 마지막으로 삼배를 올리고 반납 의식을 마쳤다. 13일간 어디를 가나 늘 함께 했던 가사와 발우를 벗어 반납을 하려니 시원섭섭함한 마음이 들었다.
회향식을 마친 오후 4시 석가족이 직접 준비한 정성어린 저녁 공양을 했다. 순례단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갔고 이날의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석가족이 준비한 짜이와 쿠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어느덧 인도 성지 순례를 시작한지 12일째가 되었다. 이제는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처음엔 이렇게 이른 새벽에 눈을 뜨는게 쉽지 않았지만 점점 익숙해져가고 성지순례는 거의 마무리가 되고 있다. 새벽 예불(禮佛)과 이른 아침 공양을 마치고 우리 순례단이 방문한곳은 불교의 4대 성지 중 하나인 고대 코살라국의 수도인 쉬라바스티(사위성) 에 머물며 기원정사를 세운 수닷타 장자탑, 앙굴리말라탑, 그리고 부처님이 가장 오래 머무시며 금강경을 설한 기원정사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코살라국은 강한 군사력으로 한때 번영을 이룬 나라였지만 지금은 폐허로 변해버려 예전의 모습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부처님 성도 후 3년째 되던 해 이곳 쉬라바스티(사위성)에 첫 발을 디딘 후 이곳은 부처님의 중요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부처님의 45년간 교화 여정 중 이곳 사위성에서 24안거를 보냈는데 그중 19안거를 기원정사에서 머물 정도로 매우 사랑한 곳이라고 한다.
아침 8시20분쯤 수닷타 탑터에 도착하여 탑돌이와 참배를 하고 자리에 앉아 스님은 사위성에서 천하의 살인자였던 앙굴리 말라가 어떻게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는지에 관한 과정을 설명 해 주셨다.
쉬라바스티의 부유한집 출신인 앙굴리 말라는 어릴적 인도의 북쪽인 그당시 문명이 발달한 탁실라라는 곳에 위대한 스승에게 어린 아들을 유학보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스승이 더이상 가르칠게 없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앙굴리 말라는 안가겠다 더 배우겠다고 하고 스승은 가라고 하는 와중에 스승은 굳이 한가지 더 배울게 있긴한데 그건 행하기가 너무 어려워서 가르칠 수 없다는 말에 앙굴리 말라는 두세번 더 간청을 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행하겠다고 매달리니 스승이 수행법을 알려주기를 '백 명의 사람을 죽여서 그 손가락을 목걸이로 만들어 걸어라. 백명의 사람들 죽여 천개의 손가락으로 만든 염주를 목에 걸면 그 즉시 승천한다. 이 몸 그대로 하늘 나라에 바로 태어나게 되느니라'
보통 사람이라면 의혹을 가질법도 한데 여러번 약속한 앙굴리 말라는 그대로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기 시작한다. 그후 수많은 사람들을 살해하여 피가 흐르는 손가락을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고 사람을 죽이니 소문은 빠르게 퍼져 사람들이 다 도망을 가 더이상 사람을 죽일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점점 고향으로 돌아오며 살인을 했고 이 사실이 쉬라바스티까지 소문이 나자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당시의 왕 빠세나디는 살인자를 잡으려 군대를 동원하는 등 당시 사회가 매우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다. 이 소식을 들은 앙굴리 말라의 어머니는 부처님께 아들을 살려달라 호소를 하기까지 했다. 부처님은 어머니의 청을 듣고 피하라는 사람들의 말을 뒤로한채 '여래에게는 두려움이 없다'라며 천천히 앙굴리 말라가 오는 쪽으로 걸어가자 얼마지 않아 칼과 방배를 든 앙굴리말라가 나타났다. 앙굴리말라가 아무리 쫓아와도 부처님과의 거리는 가까워 지지 않자 '사문아. 거기 섰거라'하며 고함을 지르며 '왜 서라는데 안서느냐?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하고 화를 내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길 '여래는 멈춘 지 오래 되었다. 멈추지 않는 것은 바로 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앙굴리말라는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니 부처님이 '여래는 사람을 해치는 행위를 멈춘지가 오래되었다. 그런데 너는 그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라고 대답을 하니 그 말을 듣고 앙굴리말라는 꿈에서 깨듯 정신이 번쩍 들어 자신의 악행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어찌할지 여쭈었다. 이렇게 해서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지혜의 눈이 열려 출가를 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이 설법을 듣고 사람이 어리석은 신념에 빠지면 아무것도 보이지않고 들리지 않고 오직 자신조차 인지 못하는 강력한 세뇌(洗腦)가 되어 한평생을 그 족쇄에 스스로를 가두며 자신과 타인 더 나아가 사회를 혼탁하게 만드는 오늘날의 사이비 종교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늘 자신의 생각이 절대적인 진실이 아닌 하나의 관점일 수 있다는 태도와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는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체 만물이 고정된 실체나 불변하는 자아 없이 서로 연결 되어있다는 부처님의 공의 의미를 다시 새겨본다.
이곳은 주변에 숲이 우거져 있고, 밝고 안온하며 차분한 분위기 였다. 12세기 이슬람 세력에 의해 파괴된 후, 1863년 영국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發掘)되었는데 현재는 건물의 벽돌 기초와 옛 승방 터 대강당만 남아있고, 유적지 안에는 부처님께서 깨달음 얻은 보드가야 보리수의 묘목을 아난다 존자가 심었다고 존해지는 특별한 보리수도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앙굴라말라 탑돌이를 한뒤 탁발을 해서 기원정사를 향해 '환지본처'하였다. 기원정사로 향하는 길에 천축선원 대인스님께서 준비한 공양물을 탁발하여 각자의 발우에 받고 2,600년전 부처님과 제자들이 탁발했던 것처럼 우리 순례단도 수행의 마음으로 공양을 받았다. 음식을 담은 발우를 두손으로 소중히 들고 염불을 하며 걸어서 기원정사(祇園精舍)까지 왔다.
경내를 한바퀴 돈 후 모두 한자리에 앉아 예참 공양을 올린 후 스님은 기원정사 창건 유래에 대한 말씀을 들려주셨다. 말씀이 끝나자 순례자들은 탁발해온 음식을 자리에 앉아 공양했다. 발우에 담긴 음식을 정성껏 하나하나 되새기며 천천히 먹었다. 흔히 밥먹는 시간이면 서로 얘기를 나누며 먹는게 일상이라면 이곳에서 먹는 음식은 수행하는 것처럼 모두가 조용한 가운데 오로지 먹는 것에만 집중해서 숭고한 마음으로 먹었던것 같다. 부처님과 제자들도 이렇게 조용하게 집중하며 공양을 했을것 같다.
기원정사 (제타바타가)
이어서 경전 독송과 명상 후 기원정사에서 잠시 자유시간이 주어져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직접 걷고 느끼며 사진도 찍으면서 시간을 보낸후 다시 모여 '절의 참뜻'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정사'나 '도량'이라 불리는 곳은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세속의 눈으로 보면 시체를 버리는 숲은 가장 부정하고 더러운 장소지만 마음이 청정한 수행자가 그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곳은 성소(聖所)가 된 것이다. 같은 땅이라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가장 부정한 곳이 될 수도 가장 성스러운 곳이 될수도 있다. 그래서 본래 성스럽다 할것도, 부정하다 할것도 없다 하여 '불구부정(不垢不淨)'이라고 한다.
아리조나에서 활동하는 서양화가 조윤희작가(오른쪽)와 함께
이 기원정사가 세상에서 가장 청정하고 성스러운 곳으로 불릴 수 있었던 것은, 부처님과 제자들이 이곳에서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선정을 닦아 마음을 고요히 지혜를 증득해 밝음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지금 '모자이크 붓다'가 필요할까? 먼저 자기 자신을 해방시키는것이 수행의 출발이나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오늘의 세상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을 낳고, 환경 위기를 초래 하며, 모든 문제를 힘으로 해결하려는 방향으로 흐르는데 이럴 때 일수록 우리는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개인의 평화와 사회의 평화 그리고 사회정의를 함께 세워 나아가야 한다는 점을 설명 해 주셨다. 새로운 시대에는 한 사람의 완성된 인격보다 여럿이 어울려 하나의 인격을 이루는 것이 중요한데 이것이 바로 '모자이크 붓다'라고 한다.
부처님 성지를 순례하며 붓다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지순례의 또다른 의미는 검소하게 먹고, 입고, 자고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는데 있다. 이제 우리는 지금 자신이 가진 것을 바르게 사용하고 있는지 돌아보고 그 능력을 자기파괴에 쓰지 말고 자신과 이웃과 세상을 이롭게 하는데 쓰자는 말씀으로 마무리를 해 주셨다.
그리고 특별히 이날 우리가 묵을 숙소 천축선원(天竺禪院)으로 돌아가면 공양 전까지 장이 열린다고 한다. 스탭들이 장을 봐뒀는데 개인당 오렌지 2개, 바나나 2개, 구아바 1개, 토마토 2개, 당근 2개 그리고 파파야와 양배추는 조별로 1개씩이라고 하니 모두들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이날 먹은 과일들은 정말 특별했다. 맛은 이루 말할 수 없고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음식이었던지 그렇게 감사히 소중히 먹어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다.
순례단은 서둘러 짐을 챙기고 잠자리에 부지런히 들었다.
천축선원
다음날은 새벽 1시30분쯤 기상하여 짐을 싸서 2시30 상카시아 탑터로 출발했다. 상카시아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위치한 곳으로 불교8대 성지 중 하나이다.
이 지역은 역사적으로 붓다의 부족인 석가족이 코살라국의 침략을 피해 이주하여 정착한 곳으로 현대에도 많은 석가족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아소카왕이 이곳에 많은 스투파와 대규모 사원을 건립하였으나 불교 유적의 흔적은 없고, 불교 유적지로 추정되는 허물어진 탑 위에 힌두 사원을 세워 링가를 모시고 있다. 지금은 석가족의 후예로 '샤카'라는 성을 가진 불교인들이 이 지역에 아직 살고 있는데 이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졌을 때에도 조상 대대로 불교를 믿어온 사람들로 상카시아 근방 '이따와'란 도시에서 2천 명 정도의 회원을 가진 '불교 청년회'를 조직해 활동 중이다.
상카시아에서 스님의 법문에 귀기울이는 불자들
이곳 상카시아는 부처님의 일생과 직접적인 이야기가 많지는 않다고 한다. 상카시아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부처님께서 도리천(忉利天)에 올라가 어머니에게 설법을 해 드리고 다시 내려오셨다는 설화가 대표적이다.
불교 4대 성지는 부처님께서 태어나시고, 도를 이루시고, 설법하시고, 열반하신 곳이라는점, 나머지 4곳 중 3곳은 부처님께서 교화활동을 많이 하신 지역이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상카시아에 얽힌 이야기는 다소 신화적이고 신비적 현상을 중심으로 중요 성지로 선정된 것으로 여겨진다.
라즈기르는 성난 코끼리가 부처님 앞에 무릎꿇은 이야기, 쉬라바스티는 천불화현으로, 바이샬리는 원숭이가 부처님께 꿀공양한 이야기로, 이곳 상카시아는 도리천에 올라가셨다가 내려오신 이야기로 널리 알려진걸 보면 네곳 모두 어떤 신비한 현상을 중심으로 선정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상카시아의 설화를 보면 인도든 한국이든 부모를 존중하고 조상을 섬기는 문화가 있다. 이런 문화 속에서 수행자가 집떠나 출가한다는 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큰 불효로 여겨질 수 있다. 불교의 가르침이 아무리 위대해도 부모를 가슴 아프게 했다는 사실에 대해 변명의 여지가 없다. 특히 조상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권에서 출가는 완전히 불효막심(不孝莫甚) 한 일인 것이다. 이에 반해 인도는 조상섬기는 문화는 있지만 출가를 불효로 취급하는 문화는 거의 없지만 그럼에도 부모에 대한 죄책감은 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상카시아의 설화의 의미는 세속에서 부모를 편히 모시는 것보다 부모를 깨닫게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드리는 것이 최고의 효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생겨난 이야기가 아닐까 짐작해 본다. 그래서 목련존자가 지옥에 떨어진 어머니를 구제하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이리라.
상카시아의 모습은 교통이 다소 불편하고 번화한 관광지가 아니기에 일반 관관객 보다는 순례자들이 주로 찾는 차분하고 정적인 분위기였다. 대규모 사원이 있던 과거와 달리 현재는 터만 남아있고, 한적한 시골의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다음 장소 담마센터에 도착하자 입구에서부터 석가족이 싱싱한 꽃으로 직접 만든 꽃목걸이를 들고 순례단 한명한명의 목에 걸어주고 맨앞 스님이 걷는 길 앞에 꽃잎을 뿌려주는 등 최고의 환대를 해 주었다.
순례단이 자리에 착석하자 무대앞에 석가족의 환영식이 시작되었다. 깐노즈, 이타와, 깐푸르, 메인뿌리, 에타 등 각지에서 온 석가족 약 200여명이 스님과 순례단을 맞아 주었다. 한명한명이 스님께 예를 갖추고난 뒤 학생들이 준비한 소박한 공연이 이어졌다. 스님께서 감사 인사말씀을 전해 주시고, 환영식이 마무리 되었다. 이후 제 35차 성지순례 회향식이 시작되었다. 삼귀의, 반야심경, 청법가로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스님의 법문이 시작되었다.
'어떻게 하면 인도에서 불교가 다시 꽃필 수 있을지', '자꾸 물러서는 마음이 올라올 때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내용이었다. 우리가 이렇게 고생스러운 순례를 다녔는데 이 고생을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 고생을 고생으로만 여기는 마음으로 순례를 마치면 손해만 보게 되지만 그걸 극복한 경험으로 남기면 그건 내인생의 큰 자산이 된다. 이번 성지 순례가 모두에게 그런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으로 마무리가 되었다. 이후 함께 하신 분들의 인사말씀이 이어졌고, 스님의 안내로 가사와 발우를 반납하는 의식이 진행 되었다. 가사를 입고 삼배를 올린뒤 이어 가사를 벗어 가지런히 접고, 무릎을 꿇은 채 가사 위에 발우를 얹어 눈높이로 들고 "가사와 발우를 부처님께 바칩니다" "다음에 또 출가 하겠습니다" 라고 외친후 마지막으로 삼배를 올리고 반납 의식을 마쳤다. 13일간 어디를 가나 늘 함께 했던 가사와 발우를 벗어 반납을 하려니 시원섭섭함한 마음이 들었다.
회향식을 마친 오후 4시 석가족이 직접 준비한 정성어린 저녁 공양을 했다. 순례단은 식사를 마치고 각자 숙소로 돌아갔고 이날의 일정은 이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석가족이 준비한 짜이와 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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