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팔에 와서 두번째 날이 밝았다. 이날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고향인 카필라 성을 방문했을 때 머물렀으며 그의 가족들과 친족들이 불교에 귀의(歸依)하고 출가하는 등 깊은 인연이 있는 탄센과 부처님께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셨던 고향인 카필라성(카필라가스투) 그리고 출가 후 가족들과 다시 만나셨던 역사적인 장소 쿠단을 방문하는 날이다.
새벽 2시에 버스에 탄 순례단은 해발 2,000m의 고원 도시 탄센에서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기 위해 달렸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탄센에 도착, 안개가 자욱한 동네를 고요하게 걷기 시작했다. 산까지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랐다. 드디어 한시간 정도 지나니 산 정상에 도착, 여전히 주변은 어두웠다. 잠시 계단에 앉아있자니 서서히 날이 밝더니 7시쯤 되자 히말라야 산맥 사이 설산 위로 해가 천천히 떠오른다. 기다림끝에 보이는 태양은 큰 감동과 기쁨으로 탄성이 나왔다. 새벽일출은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준다.

이곳 탄센에서의 태양을 젊은 부처님께서는 보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한참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은뒤 우리는 스님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넓은 공터에 앉아 공양게송을 한뒤 준비한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새벽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던 네팔의 작은 마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인도에선 느끼지 못한 아기자기하고 색감도 다양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길에 쓰레기가 거의 보이지 않을정도로 깔금하고 쾌적한 느낌의 동네였다. 인도의 길거리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길가에 과일, 야채가게, 빵가게에서 내놓은 물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어린아이들이 군것질하듯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가서 이것저것 사서 가방에 넣어 버스에 탔다.

곧이어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으로 출발, 오후 12시 40분쯤 도착하여 순례단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염불을 하며 스님의 안내에 따라 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29년간 호화로운 왕자 시절을 보냈던 궁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화려한 유적지 보다는 소박하고 차분하며, 인간 붓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바로 이곳에서 태자 싯달타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출가를 결심하게 된 사문유관(四門遊觀)의 과정을 스님의 법문으로 다시 듣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시작된 바로 이곳에서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당시 상황을 상상 해 보며 잠시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숨을 들이 쉬어 보았다.

우리 순례단은 청년 싯달타가 동문을 지나 출가 했듯이 우리들도 동문을 지나카필라성을 떠났다. 자신의 가족들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등지고 그렇게 깨달음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밖으로 나와 카필라성을 향해 염불을 한뒤 다시 길을 떠났다. 마을로 접어들자 동네 아이들이 따라온다. 논길로 접어들자 마을사람들이 사는 풍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을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후 3시30분쯤 쿠단에 도착했다. 부처님 성도 후 6년만에 고향을 찾은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아버지 정반왕(숫도다나)이 직접 마중나와 맞이한 역사적 장소이다. 바로 이곳에서 태자 싯달타가 궁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12년만에 아버지를 만난 부자 상봉이 이뤄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에도 이를 기념하는 탑에서 순례단은 가사(袈裟)를 수하고 탑을 한바퀴 돈 후 자리에 앉아 카필라성에서 펼쳐진 여러 일화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족과 계급의 틀을 어떻게 넘었는지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그당시 상가 안에서는 어떤 계급의 차별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신분 높은 사람들이 출가해서 낮은 계급의 출가자들과 한 공간에서 평등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나 가족들로 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계급 낮은 사람들의 출가는 오히려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는 의식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었다면 계급이 높은 사람들의 출가는 매우 힘든 도전이었으리라.
인간의 가치를 태생적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그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당시 신분 계급 차별이 극심했던 고대 인도 사회에 던진 매우 혁신적인 평등의 메시지였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강력한 메시지로 작용된다.


이렇게 네팔에서의 순례일정을 마치고 대성석가사에서 취침을 한뒤 다음날 이른 새벽 인도에서 국경을 넘어 삐쁘라하와 탑에왔다. 이곳은 부처님 입멸 후 석가족이 분배받아 안치한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으로 1898년 영국인들이 발굴한 이 탑에서 '카필라바스투' 명문이 새겨진 사리용기와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부처님의 역사성을 입증한 매우 중요한 성지이다.
아침 9시25분이 되어 안개가 짙게 깔린 삐쁘라하와 탑은 넓은 평원 한가운데 낮고 둔중하게 서 있었다. 역시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탑돌이를 하고나서 예불과 명상을 했다. 이후 버스로 세시간 반을 달려 오후 3시 쉬라바스티의 천불 화현탑에 왔다. 부처님 당시 쉬라바스티의 사람들은 수행의 깊이나 가르침보다 신통이나 기적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수닫타 장자는 안타깝게 여겨 부처님께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청하였고, 부처님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쉬라바스티 성 밖으로 대중을 모이게 하여 망고나무 씨 하나를 땅에 심고, 곧 싹이 트며 빠르게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나무에 수많은 망고 열매가 노랗게 익었고, 그 망고가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화현했다고 한다. 망고 나무 위에 황금빛 부처님이 천 분이 나타난 모습에 대중이 감동을 받고 이후 부처님 법을 듣고 감화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이 기적을 목격한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바사닉)왕이 완전히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이를 기념해 대규모 천불화현탑을 세우며 불교가 널리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케사리아 대탑에 이어 규모가 매우 큰 탑으로, 케사리아 대탑 발견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탑으로 알려졌었다. 현재는 화려한 건축물 대신 오랜 세월 풍화된 붉은 벽돌과 커다란 탑의 잔해가 형태로 남아있다.

다음 장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반기는 가운데 동원정사로 걸어 이동했다. 이곳은 비구니 수행처로, 불교 역사상 최고의 여성 재가불자(在家佛子)로 꼽히는 베사카가 설립하여 승가에 기증한 사찰이다. 그녀에 관한 유명한 일화(逸話)는 어느날 사랑하는 손녀를 잃고 깊은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처님께 마음을 털어놓자 부처님께선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은지 적은 것이 좋은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다고 대답했고 부처님은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위성 사람만큼 많다면 어떻겠냐 물으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 답했고 또다시 부처님은 사위성에서는 하루에 몇명이나 죽느냐 묻자 베사카 부인은 적어도 하루에 한명 이상은 죽을것이라 대답했고 또다시 부처님은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 슬픔에 잠겨 울겠군요..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사카 부인은 이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스님은 성지에 대한 설명을 마친후 마을앞에 모인 150여명의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 주시고 또다시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향했다. 인도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길위에 펼쳐지고 까마득한 과거 어느날 어딘가에 내가 이곳에서 살았던것 같은 친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천축선원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해주신 따뜻한 한국식 국과 밥으로 저녁공양을 한뒤 마당에서 저녁 예불을 올린뒤 잠자리에 들었다.

글 사진 유정선 | 미주한인우리세상 앵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네팔에 와서 두번째 날이 밝았다. 이날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고향인 카필라 성을 방문했을 때 머물렀으며 그의 가족들과 친족들이 불교에 귀의(歸依)하고 출가하는 등 깊은 인연이 있는 탄센과 부처님께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내셨던 고향인 카필라성(카필라가스투) 그리고 출가 후 가족들과 다시 만나셨던 역사적인 장소 쿠단을 방문하는 날이다.
새벽 2시에 버스에 탄 순례단은 해발 2,000m의 고원 도시 탄센에서 히말라야의 일출을 보기 위해 달렸다. 새벽 5시가 되어서야 탄센에 도착, 안개가 자욱한 동네를 고요하게 걷기 시작했다. 산까지 오르는 길은 매우 가파랐다. 드디어 한시간 정도 지나니 산 정상에 도착, 여전히 주변은 어두웠다. 잠시 계단에 앉아있자니 서서히 날이 밝더니 7시쯤 되자 히말라야 산맥 사이 설산 위로 해가 천천히 떠오른다. 기다림끝에 보이는 태양은 큰 감동과 기쁨으로 탄성이 나왔다. 새벽일출은 어디에서나 사람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준다.
이곳 탄센에서의 태양을 젊은 부처님께서는 보시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한참을 감상하고 사진을 찍은뒤 우리는 스님을 따라 산속으로 들어가 넓은 공터에 앉아 공양게송을 한뒤 준비한 도시락으로 아침 공양을 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위해 주차장으로 내려왔다. 새벽 어둠속에서 보이지 않던 네팔의 작은 마을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오는데 인도에선 느끼지 못한 아기자기하고 색감도 다양한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길에 쓰레기가 거의 보이지 않을정도로 깔금하고 쾌적한 느낌의 동네였다. 인도의 길거리와는 매우 다른 느낌이다. 길가에 과일, 야채가게, 빵가게에서 내놓은 물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어린아이들이 군것질하듯 일행을 놓치지 않으려고 뛰어가서 이것저것 사서 가방에 넣어 버스에 탔다.
곧이어 카필라바스투(카필라성)으로 출발, 오후 12시 40분쯤 도착하여 순례단은 입구에서 가사를 수하고 염불을 하며 스님의 안내에 따라 성지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29년간 호화로운 왕자 시절을 보냈던 궁터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화려한 유적지 보다는 소박하고 차분하며, 인간 붓다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평화롭고 고즈넉한 분위기였다.
바로 이곳에서 태자 싯달타는 타인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며 출가를 결심하게 된 사문유관(四門遊觀)의 과정을 스님의 법문으로 다시 듣고 부처님의 깨달음이 시작된 바로 이곳에서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당시 상황을 상상 해 보며 잠시 나무에 기대어 눈을 감고 숨을 들이 쉬어 보았다.
우리 순례단은 청년 싯달타가 동문을 지나 출가 했듯이 우리들도 동문을 지나카필라성을 떠났다. 자신의 가족들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등지고 그렇게 깨달음을 향해 걸어간 것이다. 우리 일행들은 밖으로 나와 카필라성을 향해 염불을 한뒤 다시 길을 떠났다. 마을로 접어들자 동네 아이들이 따라온다. 논길로 접어들자 마을사람들이 사는 풍경이 우리를 맞이한다. 마을사람들도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모습이 친근하게 느껴진다.
오후 3시30분쯤 쿠단에 도착했다. 부처님 성도 후 6년만에 고향을 찾은 부처님을 맞이하기 위해 아버지 정반왕(숫도다나)이 직접 마중나와 맞이한 역사적 장소이다. 바로 이곳에서 태자 싯달타가 궁을 떠나 깨달음을 얻고 12년만에 아버지를 만난 부자 상봉이 이뤄진 역사적인 장소이다. 이곳에도 이를 기념하는 탑에서 순례단은 가사(袈裟)를 수하고 탑을 한바퀴 돈 후 자리에 앉아 카필라성에서 펼쳐진 여러 일화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이 가족과 계급의 틀을 어떻게 넘었는지에 대한 법문을 들었다.
그당시 상가 안에서는 어떤 계급의 차별도 허용되지 않았기에 신분 높은 사람들이 출가해서 낮은 계급의 출가자들과 한 공간에서 평등하게 생활하는 모습을 보며 친구나 가족들로 부터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기도 했다고 한다. 계급 낮은 사람들의 출가는 오히려 스스로를 천하게 여기는 의식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었다면 계급이 높은 사람들의 출가는 매우 힘든 도전이었으리라.
인간의 가치를 태생적 신분이나 계급이 아닌, 그사람의 마음가짐과 행동으로 결정된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당시 신분 계급 차별이 극심했던 고대 인도 사회에 던진 매우 혁신적인 평등의 메시지였고,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적용되는 강력한 메시지로 작용된다.
이렇게 네팔에서의 순례일정을 마치고 대성석가사에서 취침을 한뒤 다음날 이른 새벽 인도에서 국경을 넘어 삐쁘라하와 탑에왔다. 이곳은 부처님 입멸 후 석가족이 분배받아 안치한 진신사리탑(眞身舍利塔)으로 1898년 영국인들이 발굴한 이 탑에서 '카필라바스투' 명문이 새겨진 사리용기와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고고학적으로 부처님의 역사성을 입증한 매우 중요한 성지이다.
아침 9시25분이 되어 안개가 짙게 깔린 삐쁘라하와 탑은 넓은 평원 한가운데 낮고 둔중하게 서 있었다. 역시 순례단은 가사를 수하고 탑돌이를 하고나서 예불과 명상을 했다. 이후 버스로 세시간 반을 달려 오후 3시 쉬라바스티의 천불 화현탑에 왔다. 부처님 당시 쉬라바스티의 사람들은 수행의 깊이나 가르침보다 신통이나 기적같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수닫타 장자는 안타깝게 여겨 부처님께 특별한 모습을 보여주기를 간청하였고, 부처님은 그 요청을 받아들여 쉬라바스티 성 밖으로 대중을 모이게 하여 망고나무 씨 하나를 땅에 심고, 곧 싹이 트며 빠르게 자라 큰 나무가 되었고, 나무에 수많은 망고 열매가 노랗게 익었고, 그 망고가 모두 부처님의 모습으로 화현했다고 한다. 망고 나무 위에 황금빛 부처님이 천 분이 나타난 모습에 대중이 감동을 받고 이후 부처님 법을 듣고 감화되는 사람이 점차 늘어난 것이다.
이 기적을 목격한 코살라국의 프라세나짓(바사닉)왕이 완전히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고, 이를 기념해 대규모 천불화현탑을 세우며 불교가 널리 번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탑은 케사리아 대탑에 이어 규모가 매우 큰 탑으로, 케사리아 대탑 발견 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탑으로 알려졌었다. 현재는 화려한 건축물 대신 오랜 세월 풍화된 붉은 벽돌과 커다란 탑의 잔해가 형태로 남아있다.
다음 장소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와 반기는 가운데 동원정사로 걸어 이동했다. 이곳은 비구니 수행처로, 불교 역사상 최고의 여성 재가불자(在家佛子)로 꼽히는 베사카가 설립하여 승가에 기증한 사찰이다. 그녀에 관한 유명한 일화(逸話)는 어느날 사랑하는 손녀를 잃고 깊은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부처님께 마음을 털어놓자 부처님께선 그녀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많은 것이 좋은지 적은 것이 좋은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많을 수록 좋다고 대답했고 부처님은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람이 사위성 사람만큼 많다면 어떻겠냐 물으니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 것이라 답했고 또다시 부처님은 사위성에서는 하루에 몇명이나 죽느냐 묻자 베사카 부인은 적어도 하루에 한명 이상은 죽을것이라 대답했고 또다시 부처님은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매일 슬픔에 잠겨 울겠군요..라는 말씀을 하시자 베사카 부인은 이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스님은 성지에 대한 설명을 마친후 마을앞에 모인 150여명의 아이들에게 과자를 나눠 주시고 또다시 숙소인 천축선원으로 향했다. 인도의 평화로운 마을 풍경이 길위에 펼쳐지고 까마득한 과거 어느날 어딘가에 내가 이곳에서 살았던것 같은 친근함과 편안함이 느껴진다. 천축선원에 도착하여 미리 준비해주신 따뜻한 한국식 국과 밥으로 저녁공양을 한뒤 마당에서 저녁 예불을 올린뒤 잠자리에 들었다.
글 사진 유정선 | 미주한인우리세상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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