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봉암 67주기 추모식..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반세기가 지나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선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명예(名譽)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7주기 추모식이 31일 오전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유족과 정치권, 시민사회, 교육계 인사들이 참석해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 그리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정치인 조봉암의 삶을 기리며 독립유공자 서훈(敍勳)의 조속한 추진을 촉구했다.


추모식은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유족회가 주최하고 인천시가 후원했으며, 새얼문화재단, 인천시교육청, 강화군청, 중랑구청 등이 함께 했다. 섭씨 34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도 이모세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족, 김교흥·이훈기 국회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대표, 박찬대 인천시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박종혁 인천시의회 의장, 박남춘 전 인천시장,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등 각계 인사와 시민들이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봉암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대표적인 개혁 정치인이었다. 박찬대 인천시장은 추도사에서 "조봉암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완수해 수백 년 이어져 온 지주제를 해체했고,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차가운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뒤 반세기가 훌쩍 지난 뒤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아직도 명예회복은 완전하지 않다"며 "독립운동가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반드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교흥 국회의원도 "죽산은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먼저 읽고 미래를 이야기한 정치인"이라며 "법적 명예는 회복됐지만 역사적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장식 조국혁신당 대표는 "죽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개혁적 공직자, 정치인으로 농지개혁과 사회경제적 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라며 "오늘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도 그의 철학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인천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하며 해방 이후 사회개혁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진보당을 창당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통일을 정치 노선으로 제시했다.
1956년 진보당 창당대회에서 그는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며, 모든 사람이 자유와 사회적 보장을 누리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자"고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정치 비전이었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정권 시절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과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59년 7월 31일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훗날 대표적인 사법 오판으로 재조명됐다. 유족의 재심 청구 끝에 서울고등법원은 2011년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상고하지 않으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법원은 당시 증거와 수사 과정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죽산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독립유공자 서훈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일제 말기 매일신보에 실린 국방헌금 관련 기사 등의 사실관계를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은 해당 기사와 관련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서훈 심사를 조속히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재심 무죄로 법적 명예는 회복됐지만 역사적 명예회복은 아직 미완"이라며 "독립운동가 조봉암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서훈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봉암 선생의 외손녀 이성란 씨는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혼란한 시대에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며 "후손들이 그 뜻을 제대로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도 조봉암 정신을 알리는 문화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죽산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 문화제는 오는 10월 10일 인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열린다. 새얼문화재단은 인천대공원에 조봉암 선생 석상(石象)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묘 고문 박흥렬 전 강화군의원(조봉암문화재준비위원장) 임경일 여운영기념사업회 운영위원
67년이 흘렀지만 조봉암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독립운동가이자 농지개혁의 설계자,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꿈꾼 정치인, 그리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시대의 희생양이 된 인물. 이날 망우리공원에 모인 추모객들은 "죽산의 삶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완성해야 할 민주주의와 평화의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이기묘 AOK한국 고문 겸 모두행복통일포럼 대표는 “오늘날 한국은 갈등만 커지고 남북은 경색(梗塞)되고 세계는 전쟁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조봉암 선생이 꿈꾼 통일평화와 세계평화의 과제들은 남은 우리의 몫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죽산 조봉암의 삶
죽산(竹山)은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3·1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 등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청년 시절 대부분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 구조를 해체하고 경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한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죽산은 진보당을 창당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통일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약 216만 표를 얻으며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지지를 받았고, 평화적 방법을 통한 통일과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대안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그를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로 기소했고,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오판으로 재평가됐으며, 서울고등법원 재심은 2011년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죽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개혁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꿈꾼 정치인이었으며, 분단을 넘어 평화통일을 모색한 선구적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정의로운 국가, 사회개혁, 평화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조봉암 67주기 추모식..독립유공자 서훈 촉구
"반세기가 지나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선생이 마땅히 누려야 할 명예(名譽)는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습니다.“
죽산(竹山) 조봉암(1899~1959) 선생의 67주기 추모식이 31일 오전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묘역에서 열렸다. 추모식에는 유족과 정치권, 시민사회, 교육계 인사들이 참석해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 그리고 평화통일을 주장했던 정치인 조봉암의 삶을 기리며 독립유공자 서훈(敍勳)의 조속한 추진을 촉구했다.
추모식은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와 유족회가 주최하고 인천시가 후원했으며, 새얼문화재단, 인천시교육청, 강화군청, 중랑구청 등이 함께 했다. 섭씨 34도를 웃도는 폭염 속에서도 이모세 죽산조봉암선생기념사업회 회장과 유족, 김교흥·이훈기 국회의원, 신장식 조국혁신당 대표, 박찬대 인천시장,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박종혁 인천시의회 의장, 박남춘 전 인천시장, 조희연 전 서울시교육감 등 각계 인사와 시민들이 묘역을 찾아 헌화하고 고인을 추모했다.
조봉암 선생은 대한민국 건국 초기의 대표적인 개혁 정치인이었다. 박찬대 인천시장은 추도사에서 "조봉암 선생은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완수해 수백 년 이어져 온 지주제를 해체했고, 대한민국 경제 발전의 주춧돌을 놓았다"고 평가했다. 이어 "차가운 형장에서 생을 마감한 뒤 반세기가 훌쩍 지난 뒤에야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지만, 아직도 명예회복은 완전하지 않다"며 "독립운동가로서 정당한 평가를 받을 수 있도록 반드시 독립유공자 서훈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교흥 국회의원도 "죽산은 시대정신을 누구보다 먼저 읽고 미래를 이야기한 정치인"이라며 "법적 명예는 회복됐지만 역사적 평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신장식 조국혁신당 대표는 "죽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개혁적 공직자, 정치인으로 농지개혁과 사회경제적 개혁을 이끌었던 인물"이라며 "오늘의 불평등과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도 그의 철학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평가했다.
인천 강화 출신인 조봉암 선생은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뒤 중국 상하이와 모스크바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펼쳤으며,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을 지냈고,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농지개혁을 추진하며 해방 이후 사회개혁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후 진보당을 창당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통일을 정치 노선으로 제시했다.
1956년 진보당 창당대회에서 그는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며, 모든 사람이 자유와 사회적 보장을 누리는 복지사회를 건설하자"고 선언했다. 당시로서는 매우 선구적인 정치 비전이었다.
그러나 조봉암 선생은 이승만 정권 시절 이른바 '진보당 사건'으로 국가보안법과 간첩 혐의로 기소됐고, 항소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59년 7월 31일 형이 집행됐다. 이 사건은 훗날 대표적인 사법 오판으로 재조명됐다. 유족의 재심 청구 끝에 서울고등법원은 2011년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검찰이 상고하지 않으면서 판결이 확정됐다. 법원은 당시 증거와 수사 과정에 중대한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다.
이와 함께 죽산의 진정한 명예회복을 위해 독립유공자 서훈이 조속히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국가보훈부는 일제 말기 매일신보에 실린 국방헌금 관련 기사 등의 사실관계를 검토하고 있는 가운데, 유족과 기념사업회 측은 해당 기사와 관련 기록의 신빙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서훈 심사를 조속히 마무리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참석자들은 "재심 무죄로 법적 명예는 회복됐지만 역사적 명예회복은 아직 미완"이라며 "독립운동가 조봉암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서훈이 더 이상 미뤄져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조봉암 선생의 외손녀 이성란 씨는 "할아버지는 해방 이후 혼란한 시대에도 민주주의와 평화를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며 "후손들이 그 뜻을 제대로 기억하고 미래 세대에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도 조봉암 정신을 알리는 문화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죽산 문화제'를 개최하고 있으며, 올해 문화제는 오는 10월 10일 인천 부평아트센터 해누리극장에서 열린다. 새얼문화재단은 인천대공원에 조봉암 선생 석상(石象) 건립도 추진하고 있다.
왼쪽부터 이기묘 고문 박흥렬 전 강화군의원(조봉암문화재준비위원장) 임경일 여운영기념사업회 운영위원
67년이 흘렀지만 조봉암이라는 이름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질문을 던진다. 독립운동가이자 농지개혁의 설계자,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꿈꾼 정치인, 그리고 평화통일을 주장하다 시대의 희생양이 된 인물. 이날 망우리공원에 모인 추모객들은 "죽산의 삶은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완성해야 할 민주주의와 평화의 과제"라고 입을 모았다.
이기묘 AOK한국 고문 겸 모두행복통일포럼 대표는 “오늘날 한국은 갈등만 커지고 남북은 경색(梗塞)되고 세계는 전쟁학살이 계속되고 있다. 조봉암 선생이 꿈꾼 통일평화와 세계평화의 과제들은 남은 우리의 몫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꼬리뉴스>
죽산 조봉암의 삶
죽산(竹山)은 인천 강화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 3·1운동에 참여하며 독립운동의 길에 들어섰다. 이후 중국 상하이와 러시아 등 해외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했고, 체포돼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옥고를 치르는 등 청년 시절 대부분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바쳤다.
광복 이후에는 제헌국회의원과 대한민국 초대 농림부 장관을 지내며 농지개혁을 주도했다. 지주 중심의 토지 소유 구조를 해체하고 경작농에게 토지를 분배한 농지개혁은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산업화의 토대를 마련한 역사적 개혁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죽산은 진보당을 창당해 민주주의와 복지국가, 평화통일을 핵심 가치로 내세웠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 맞서 약 216만 표를 얻으며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지지를 받았고, 평화적 방법을 통한 통일과 사회개혁을 주장하는 대안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이른바 '진보당 사건'을 통해 그를 국가보안법 및 간첩 혐의로 기소했고, 죽산은 1959년 7월 31일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훗날 이 사건은 대표적인 사법 오판으로 재평가됐으며, 서울고등법원 재심은 2011년 간첩 및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판결은 그대로 확정됐다.
죽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개혁가, 민주주의와 복지국가를 꿈꾼 정치인이었으며, 분단을 넘어 평화통일을 모색한 선구적 지도자로 기억된다. 그의 삶은 오늘날에도 정의로운 국가, 사회개혁, 평화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되묻게 하는 역사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