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월26일 월요일 우리 일행은 새벽 3시40분에 기상하여 새벽예불을 했다.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까지 버스로 약 8시간을 이동하는 날이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 어둠을 뚫고 집결.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 짐을 싸서 모여 각 조별로 채비를 한뒤 4시30분 출발을 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버스안에서 새벽기도와 명상(瞑想)을 했다. 그런데 한시간 30분쯤 지났을까...갑자기 내가 탄 4호차가 멈췄다. 버스 전조등이 고장난 것이다. 너무 이른시간이라 마을에 고치러 올 기술자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는수 없이 우리 버스의 일행은 전날 만들어 둔 아침 공양 도시락을 들고 밖에서 먹기로 했다.
서서히 새벽 동이 트는 길가에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안고 먹기 시작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크락션 소리와 우리 곁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으며 차가워진 도시락을 먹는다. 밥을 먹다보니 바로 앞벽에 냄새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소똥을 발라 놓은게 보인다...ㅎㅎㅎ 소똥앞에서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서 먼지를 뒤집어 써가며 아무 분별심없이 이렇게 즐겁게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니 소소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한두시간쯤 지났을까 기술자가 와서 전조등을 고치고 또다시 출발하였다. 늦어진 바람에 우리버스는 가야산에 방문을 못해 매우 아쉬웠다.

드디어 목적지인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수자타 아카데미에 오신걸 환영한다고 씌인 노란 아치형 문이 보이고 그 앞에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북을치고 나팔을 불며 환호하는 아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순례단을 열렬히 맞아 주었다. 내 생애 이렇게 큰 환영은 처음 받아본다. 수자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입구에 아이들은 양옆에 한줄로 길게 서서 노란 금잔화 목걸이를 손에 들고 순례단 한명한명의 목에 걸어주며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갔다. 이런 기분은 뭐랄까. 긴시간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린 피곤함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기쁨으로 가득찬 환희의 순간이었다.
순례단은 법당에서 참배와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를 하다 고인이 되신분의 탑 앞에서 예를 올렸다. 이후 수자타 아카데미 전교생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열렬한 환영 공연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무대 위에서 학생들의 여러 공연이 펼쳐졌다. 우리 순례단과 이마을 학부모 및 마을사람들은 운동장에 앉아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여러 마음이 들었다. 구걸과 약탈로 삶을 이어가던 이곳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의 동네에 학교가 들어서서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며 숨겨진 재능을 갈고닦아 공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모습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기쁨에 넘친 환영을 받은 뒤 이틀 후 수자타 아카데미 개교 기념식을 기대하며 곧바로 전정각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정각산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6년간 고행하던 곳으로 원래는 둥게스와리라 불렀으나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 오른 산이라고 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 산은 가시나무가 많은 험한 돌산이다. 오르는 동안 여전히 몸이 불편한 주민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가 들어서기 전보다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가 구걸하는 모습은 이 동네에서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 부처님이 머문 장소는 산중턱에 큰 암벽이 있고, 그 암벽 가운데에 자리한 아담한 유영굴이 있다. 이곳은 천신이 부처님께 우루벨라 마을의 핍팔라나무 아래에서 정진(精進)하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산을 지키는 용이 섭섭해 하며 자신이 사는 동굴에서 성도(成道)하기를 부탁드렸고 부처님은 이 용을 위로하기 위해 부처님의 그림자를 동굴에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굴의 이름을 유영굴이라 부른다.
부처님은 왜 6년의 고행(苦行) 끝에 그 길을 내려 놓으셨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고행의 기본 관점은 몸을 편하게 하려고 일부로 돌보지 않는데 있다고 한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앉을지 이런것에 수행자는 고민해서는 안되고 몸을 씻지도 않으며 부드러운 음식을 먹지 않는것. 이것이 당시 수행자들이 따르던 고행의 원칙이었지만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이런 고행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셨다. 부처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그너머까지의 고행을 한뒤에도 깨달음이 오지 않자 고행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자각했다. 욕망을 따르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제3의 길, 곧 중도를 발견하셨고 그 중도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니르바나를 증득(證得)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수행이 고행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이렇게 이해를 하면 좋겠다.

순례단은 스님의 설명을 들은 후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고 가사를 갖춰 입고 전정각산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유영굴을 참배했다.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와 내가 머문 숙소는 수자타 아카데미 건물 3층에 위치한 댄스홀이었는데 그곳에 각자의 침낭을 깔았다. 저녁식사를 마친뒤 우리는 수자타아카데미 내에 있는 쁘락보디홀에서 법회에 참여했다. 영상으로 학생들이 일상 - 교내청소, 화장실 청소, 식기 세척, 전정각산 쓰레기 줍기, 장식 설치까지 학생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곳이 없었다. 자신의 학교를 내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쓸고 닦는 모습에 애정이 느껴졌다. 이어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선 30여년전 처음 성지순례할때 먼저 사전답사를 왔었는데 순례객들과 함께 오면 정작 답사가 제대로 안되어 한두달전 따로 시간을 내어 꼼꼼히 살피셨다고 한다. 그때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어린아이들까지 구걸하는 모습에 왜 평일날 아이들이 학교에 안가고 구걸하고 있느냐는 스님의 질문에 천민 마을이라 정부에 얘기해도 학교를 지어주지 않기때문이린다.
해서 스님은 그럼 우리끼리 함께 짓자고 하여 동네사람들과 그렇게 여러 어려움과 우여곡절끝에 학교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양실조 걸린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 급식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학생 수가 갑자기 늘어 교실이 필요하여 당시 1층을 계획했으나 준공식도 못한채 곧바로 2층을 올리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신발도 맞춰 주며 점점 학교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유치원과 중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으나 비용의 문제로 거절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여학생들이 울면서 중학교에 가고싶다는 애원에 ‘유치원 아이들을 오전에 돌봐주면 오후에 중학교 과정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단다. 인도에서는 언니가 동생들 돌보는게 당연한 문화이기에 흔쾌히 그렇게 하게 되어 유치원과 중학교 까지 생겼는데 지금 수자타아카데미의 과제는 고등학교와 인터 칼리지라고 하는 예비 대학과정을 새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2001년 지바카 병원이 학교 옆에 설립되어 의료시설이 전무했던 이 동네 빈민가 주민들과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해 전문 의료인이 정기검진, 수액치료, 응급 처치 등을 제공하며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밤 9시30분이 되어서야 법회는 끝이 나고 우리는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글 사진 유정선 | 미주한인우리세상 앵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
1월26일 월요일 우리 일행은 새벽 3시40분에 기상하여 새벽예불을 했다. 바라나시에서 보드가야까지 버스로 약 8시간을 이동하는 날이다. 새벽 동이 트기도 전 어둠을 뚫고 집결.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나 짐을 싸서 모여 각 조별로 채비를 한뒤 4시30분 출발을 했다. 워낙 이른 시간이라 버스안에서 새벽기도와 명상(瞑想)을 했다. 그런데 한시간 30분쯤 지났을까...갑자기 내가 탄 4호차가 멈췄다. 버스 전조등이 고장난 것이다. 너무 이른시간이라 마을에 고치러 올 기술자와도 연락이 닿지 않아 그냥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는수 없이 우리 버스의 일행은 전날 만들어 둔 아침 공양 도시락을 들고 밖에서 먹기로 했다.
서서히 새벽 동이 트는 길가에서 삼삼오오 모여 도시락을 안고 먹기 시작했다. 가끔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크락션 소리와 우리 곁을 지나가는 자동차의 먼지를 뒤집어 쓰며 뭐가 그리 재밌는지 웃으며 차가워진 도시락을 먹는다. 밥을 먹다보니 바로 앞벽에 냄새가 이상해서 자세히 보니 소똥을 발라 놓은게 보인다...ㅎㅎㅎ 소똥앞에서 포장되지 않은 흙길에서 먼지를 뒤집어 써가며 아무 분별심없이 이렇게 즐겁게 도시락을 먹을 수 있다니 소소한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한두시간쯤 지났을까 기술자가 와서 전조등을 고치고 또다시 출발하였다. 늦어진 바람에 우리버스는 가야산에 방문을 못해 매우 아쉬웠다.
드디어 목적지인 수자타 아카데미에 도착했다. 저 멀리서부터 수자타 아카데미에 오신걸 환영한다고 씌인 노란 아치형 문이 보이고 그 앞에 형형색색의 전통의상을 입고 북을치고 나팔을 불며 환호하는 아이들과 마을 주민들이 순례단을 열렬히 맞아 주었다. 내 생애 이렇게 큰 환영은 처음 받아본다. 수자타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입구에 아이들은 양옆에 한줄로 길게 서서 노란 금잔화 목걸이를 손에 들고 순례단 한명한명의 목에 걸어주며 손을 잡고 함께 들어갔다. 이런 기분은 뭐랄까. 긴시간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린 피곤함이 한순간에 날아가고 기쁨으로 가득찬 환희의 순간이었다.
순례단은 법당에서 참배와 수자타아카데미에서 봉사를 하다 고인이 되신분의 탑 앞에서 예를 올렸다. 이후 수자타 아카데미 전교생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며 열렬한 환영 공연이 시작되었다. 곧이어 무대 위에서 학생들의 여러 공연이 펼쳐졌다. 우리 순례단과 이마을 학부모 및 마을사람들은 운동장에 앉아 환호와 박수를 아낌없이 보냈다. 여러 마음이 들었다. 구걸과 약탈로 삶을 이어가던 이곳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들의 동네에 학교가 들어서서 여느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고 공부를 하며 숨겨진 재능을 갈고닦아 공연을 펼치는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기쁘고 행복한 모습이 또 어디에 있을까.
이렇게 소박하지만 아름답고 기쁨에 넘친 환영을 받은 뒤 이틀 후 수자타 아카데미 개교 기념식을 기대하며 곧바로 전정각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전정각산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6년간 고행하던 곳으로 원래는 둥게스와리라 불렀으나 부처님께서 정각(正覺)을 이루기 전에 오른 산이라고 해서 불리게 된 이름이다. 이 산은 가시나무가 많은 험한 돌산이다. 오르는 동안 여전히 몸이 불편한 주민들이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학교가 들어서기 전보다는 많이 줄었다고 한다. 특히 아이가 구걸하는 모습은 이 동네에서 이제는 보기 힘들어졌다. 부처님이 머문 장소는 산중턱에 큰 암벽이 있고, 그 암벽 가운데에 자리한 아담한 유영굴이 있다. 이곳은 천신이 부처님께 우루벨라 마을의 핍팔라나무 아래에서 정진(精進)하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그러자 이 산을 지키는 용이 섭섭해 하며 자신이 사는 동굴에서 성도(成道)하기를 부탁드렸고 부처님은 이 용을 위로하기 위해 부처님의 그림자를 동굴에 남기고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 이 굴의 이름을 유영굴이라 부른다.
부처님은 왜 6년의 고행(苦行) 끝에 그 길을 내려 놓으셨을까?
간단히 말하자면 고행의 기본 관점은 몸을 편하게 하려고 일부로 돌보지 않는데 있다고 한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앉을지 이런것에 수행자는 고민해서는 안되고 몸을 씻지도 않으며 부드러운 음식을 먹지 않는것. 이것이 당시 수행자들이 따르던 고행의 원칙이었지만 부처님은 6년 고행 끝에 이런 고행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 자각하셨다. 부처님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고통 그너머까지의 고행을 한뒤에도 깨달음이 오지 않자 고행을 통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분명히 자각했다. 욕망을 따르지도 억제하지도 않는 제3의 길, 곧 중도를 발견하셨고 그 중도의 수행을 통해 마침내 니르바나를 증득(證得)했다고 한다. 불교에서의 수행이 고행이라고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라면 이번 기회에 이렇게 이해를 하면 좋겠다.
순례단은 스님의 설명을 들은 후 경전을 독송하고 명상을 하고 가사를 갖춰 입고 전정각산을 향해 예불을 올리고 유영굴을 참배했다.
수자타 아카데미로 돌아와 내가 머문 숙소는 수자타 아카데미 건물 3층에 위치한 댄스홀이었는데 그곳에 각자의 침낭을 깔았다. 저녁식사를 마친뒤 우리는 수자타아카데미 내에 있는 쁘락보디홀에서 법회에 참여했다. 영상으로 학생들이 일상 - 교내청소, 화장실 청소, 식기 세척, 전정각산 쓰레기 줍기, 장식 설치까지 학생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곳이 없었다. 자신의 학교를 내소중한 보물을 다루듯 쓸고 닦는 모습에 애정이 느껴졌다. 이어서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스님께선 30여년전 처음 성지순례할때 먼저 사전답사를 왔었는데 순례객들과 함께 오면 정작 답사가 제대로 안되어 한두달전 따로 시간을 내어 꼼꼼히 살피셨다고 한다. 그때는 길에 구걸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았다고 한다. 어린아이들까지 구걸하는 모습에 왜 평일날 아이들이 학교에 안가고 구걸하고 있느냐는 스님의 질문에 천민 마을이라 정부에 얘기해도 학교를 지어주지 않기때문이린다.
해서 스님은 그럼 우리끼리 함께 짓자고 하여 동네사람들과 그렇게 여러 어려움과 우여곡절끝에 학교를 지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영양실조 걸린 아이들이 너무나 많아 급식을 하게 되었고 그러자 학생 수가 갑자기 늘어 교실이 필요하여 당시 1층을 계획했으나 준공식도 못한채 곧바로 2층을 올리게 되었다. 아이들에게 교복을 입히고, 신발도 맞춰 주며 점점 학교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이후 유치원과 중학교를 만들어 달라는 제안이 들어왔으나 비용의 문제로 거절했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여학생들이 울면서 중학교에 가고싶다는 애원에 ‘유치원 아이들을 오전에 돌봐주면 오후에 중학교 과정을 만들자’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단다. 인도에서는 언니가 동생들 돌보는게 당연한 문화이기에 흔쾌히 그렇게 하게 되어 유치원과 중학교 까지 생겼는데 지금 수자타아카데미의 과제는 고등학교와 인터 칼리지라고 하는 예비 대학과정을 새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2001년 지바카 병원이 학교 옆에 설립되어 의료시설이 전무했던 이 동네 빈민가 주민들과 수자타아카데미 학생들을 위해 전문 의료인이 정기검진, 수액치료, 응급 처치 등을 제공하며 주민들의 건강을 책임지고 있다. 밤 9시30분이 되어서야 법회는 끝이 나고 우리는 숙소에서 잠을 청했다.
글 사진 유정선 | 미주한인우리세상 앵커
글로벌웹진 NEWSROH www.newsro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