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라도의 축구영재들
2026년 5월, 수원의 초여름 공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동안 멈춰 섰던 남북의 시계가 축구공이라는 작은 매개체를 통해 다시금 초침을 움직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는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릴 '내고향여자축구단'과 '수원FC 위민'의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선 역사적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습니다.
북한 축구팀의 방남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무려 12년 만의 일입니다. 더욱이 최근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일체의 대화가 단절된 경색 국면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수십 년간 분단과 화해의 현장을 지켜본 기자의 눈에, 경기장을 가로지를 저 축구공은 마치 얼어붙은 얼음판 위를 구르는 따스한 불씨처럼 보입니다.
능라도의 바람

이번 방남 소식을 들으며 저는 코로나19 확산 직전, 평양을 드나들며 취재했던 그 뜨거웠던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2019년 가을, 월드컵 예선 남북 대결 당시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평양 땅을 밟아 취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가장 공들여 들여다본 곳이 바로 북한 축구 영재의 산실(産室)이라 불리는 '평양국제축구학교'였습니다.
능라도 5.1 경기장 바로 뒤편, 1만여 ㎡의 부지에 자리 잡은 그곳에 들어섰을 때 저를 맞이한 것은 수천 명의 학생이 집단체조를 준비하며 내뿜는 질서정연한 활기였습니다. 차창을 통해 훈련에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평양국제학교에 당도했지요.
마중 나와 있던 장철준 교장은 저에게 학교의 현황을 소개하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7개의 인조잔디 구장과 전천후 실내 훈련장, 그리고 최신 과학 기술이 집약된 교육 시설은 이곳이 북한이 사활을 걸고 키우는 '축구 꿈나무'의 심장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본 광경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동영상으로 소개한 '축구 체조'였습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국민체조 건강체조 이런 것들을 해봤지만 축구 체조를 개발했다는 말에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과 하나가 되도록 고안된 이 체조는 기술적 숙련도를 높이는 동시에 축구의 즐거움을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장 교장은 "최신 체육 과학 자료들을 직접 번역하고 세계적인 강팀들의 경기를 분석하며 교수 훈련의 과학화를 실현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공부하는 선수', 세계를 향한 북한의 전략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의 엘리트 체육은 스파르타식 훈련에만 치중할 것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런데 직접 확인한 평양국제축구학교는 상당히 체계적이었습니다. 소학반부터 초급반, 고급중학반까지 11년 학제를 갖춘 기숙형 학교로, 오전에 일반 과목 학습을 마친 뒤에야 오후 훈련에 들어갑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속도와 거리, 각도를 축구 전술과 연결해 배우고,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어 영어 등 외국어 교육 비중을 매우 높게 잡고 있었습니다. "축구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지능형·창조형 선수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그들의 설명은 최근 북한 여자축구가 왜 세계적인 강호 대열에 올랐는지를 명확히 설명해 줍니다.

현재 남자축구는 뚜렷한 성적을 못내고 있지만 코로나 전만 해도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에 입단했던 한광성이나 오스트리아의 박광룡 등 평양국제축구학교 출신 유망선수들 여럿이 유럽 무대에 진출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들에 대한 대북제재가 없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반면 여자축구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축구강호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력 유지가 수월했습니다.
평양국제축구학교를 정점으로 지난 10년간 연령별 선수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2024년 U-20, 2025년 U-17 여자 월드컵 우승의 결실을 낳았고 유정향, 김원심, 최일선 같은 스타들도 배출했습니다. 이번에 수원에 오는 '내고향여자축구단' 역시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하니, 세계적인 기량을 눈으로 확인할 좋은 기회입니다.
'내고향'이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
'내고향'은 북한의 유명 소비재 기업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2012년 창단된 이래 4.25 체육단과 같은 전통의 강호를 제치고 북한 1부 리그의 정점에 올라선 팀이지요. ‘내고향’이라는 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뭉클하는 정감이 느껴졌습니다. 따지고보면 우리 민족의 고향은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요. 그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와 수원의 호텔에서 우리 선수들과 함께 머물며 경기를 준비한다는 사실은, 긴장감 보다는 가슴 부푼 기대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 응원단이 '단일기'를 흔드는 것조차 국제 규정의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고, 북측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강조하며 날 선 태도를 유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90분간의 치열한 승부 끝에 서로의 손을 맞잡는 그 순간, '적대적 두 국가'라는 정치적 수사(修辭)보다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DNA를 가진 '동포'의 원초적 이끌림이 먼저 작동할 것임을 말입니다.
축구공이 그리는 평화의 궤적
저는 지난 수십년간 기자로서 수많은 인연을 이어왔고, 근래는 남북 겨레 화합과 교류의 고리를 잇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해 왔습니다. 이번 경기는 단순히 아시아 챔피언을 가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12년 만에 남쪽 땅을 밟는 북측 선수들의 발걸음은, 막혀버린 남북 대화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소중한 '길트기'가 되어야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華城)의 도시 수원이 역사적인 무대가 된 것도 예사로운 인연은 아닐 것입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탄생시킨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꽃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성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수원 화성을 쌓은 후에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습니다.
정치적 계산을 떠나, 우리 시민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남과 북 두 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남녘 동포들의 뜨거운 함성이 평양국제축구학교에서 꿈을 키웠던 선수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정'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둥근 축구공은 남북 스포츠 교류의 재개를 알리는 축포가 되고, 경색된 남북 관계에 '역발상의 지혜'를 제공하는 반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2019년 평양 능라도의 바람을 타고 들려오던 아이들의 공 차는 소리가, 2026년 수원종합운동장의 함성과 만나 언젠가 하나로 울려 퍼질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언론인들이 기록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승전보(勝戰報)가 아닐까요.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http://www.newsroh.com/bbs/board.php?bo_table=crobin&sfl=wr_subject%7C%7Cwr_content&stx=%BD%BA%C6%F7%C5%D7%C0%CE%B8%D5%C6%AE+%B7%CE%BA%F3&sop=and
능라도의 축구영재들
2026년 5월, 수원의 초여름 공기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한동안 멈춰 섰던 남북의 시계가 축구공이라는 작은 매개체를 통해 다시금 초침을 움직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오는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릴 '내고향여자축구단'과 '수원FC 위민'의 AFC 여자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전은 단순한 스포츠 경기를 넘어선 역사적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습니다.
북한 축구팀의 방남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 이후 무려 12년 만의 일입니다. 더욱이 최근 북한이 남북 관계를 '적대적 두 국가'로 규정하며 일체의 대화가 단절된 경색 국면에서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이번 방문은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수십 년간 분단과 화해의 현장을 지켜본 기자의 눈에, 경기장을 가로지를 저 축구공은 마치 얼어붙은 얼음판 위를 구르는 따스한 불씨처럼 보입니다.
능라도의 바람
이번 방남 소식을 들으며 저는 코로나19 확산 직전, 평양을 드나들며 취재했던 그 뜨거웠던 시간들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2019년 가을, 월드컵 예선 남북 대결 당시 한국 기자로는 유일하게 평양 땅을 밟아 취재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때 가장 공들여 들여다본 곳이 바로 북한 축구 영재의 산실(産室)이라 불리는 '평양국제축구학교'였습니다.
능라도 5.1 경기장 바로 뒤편, 1만여 ㎡의 부지에 자리 잡은 그곳에 들어섰을 때 저를 맞이한 것은 수천 명의 학생이 집단체조를 준비하며 내뿜는 질서정연한 활기였습니다. 차창을 통해 훈련에 분주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평양국제학교에 당도했지요.
마중 나와 있던 장철준 교장은 저에게 학교의 현황을 소개하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7개의 인조잔디 구장과 전천후 실내 훈련장, 그리고 최신 과학 기술이 집약된 교육 시설은 이곳이 북한이 사활을 걸고 키우는 '축구 꿈나무'의 심장임을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본 광경 중 인상 깊었던 것은 동영상으로 소개한 '축구 체조'였습니다. 우리도 학교에서 국민체조 건강체조 이런 것들을 해봤지만 축구 체조를 개발했다는 말에 참 기발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을 자유자재로 다루며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공과 하나가 되도록 고안된 이 체조는 기술적 숙련도를 높이는 동시에 축구의 즐거움을 심어주고 있었습니다. 장 교장은 "최신 체육 과학 자료들을 직접 번역하고 세계적인 강팀들의 경기를 분석하며 교수 훈련의 과학화를 실현하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공부하는 선수', 세계를 향한 북한의 전략
우리가 흔히 오해하는 것 중 하나가 북한의 엘리트 체육은 스파르타식 훈련에만 치중할 것이라는 편견입니다. 그런데 직접 확인한 평양국제축구학교는 상당히 체계적이었습니다. 소학반부터 초급반, 고급중학반까지 11년 학제를 갖춘 기숙형 학교로, 오전에 일반 과목 학습을 마친 뒤에야 오후 훈련에 들어갑니다.
수학 문제를 풀 때 속도와 거리, 각도를 축구 전술과 연결해 배우고,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어 영어 등 외국어 교육 비중을 매우 높게 잡고 있었습니다. "축구만 잘하는 선수가 아니라, 지능형·창조형 선수를 길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그들의 설명은 최근 북한 여자축구가 왜 세계적인 강호 대열에 올랐는지를 명확히 설명해 줍니다.
현재 남자축구는 뚜렷한 성적을 못내고 있지만 코로나 전만 해도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에 입단했던 한광성이나 오스트리아의 박광룡 등 평양국제축구학교 출신 유망선수들 여럿이 유럽 무대에 진출한 것을 기억합니다, 이들에 대한 대북제재가 없었다면 조금은 다른 결과를 낳았을 것입니다. 반면 여자축구는 중국 일본 등 주변국들이 축구강호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력 유지가 수월했습니다.
평양국제축구학교를 정점으로 지난 10년간 연령별 선수들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는 2024년 U-20, 2025년 U-17 여자 월드컵 우승의 결실을 낳았고 유정향, 김원심, 최일선 같은 스타들도 배출했습니다. 이번에 수원에 오는 '내고향여자축구단' 역시 상당수가 이 학교 출신이라고 하니, 세계적인 기량을 눈으로 확인할 좋은 기회입니다.
'내고향'이라는 이름이 주는 울림
'내고향'은 북한의 유명 소비재 기업의 명칭이기도 합니다. 2012년 창단된 이래 4.25 체육단과 같은 전통의 강호를 제치고 북한 1부 리그의 정점에 올라선 팀이지요. ‘내고향’이라는 팀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뭉클하는 정감이 느껴졌습니다. 따지고보면 우리 민족의 고향은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은가요. 그들이 인천공항을 통해 들어와 수원의 호텔에서 우리 선수들과 함께 머물며 경기를 준비한다는 사실은, 긴장감 보다는 가슴 부푼 기대를 자아내게 합니다.
물론 현재의 정치적 상황은 녹록지 않습니다. 우리 응원단이 '단일기'를 흔드는 것조차 국제 규정의 조율이 필요한 상황이고, 북측 역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국호를 강조하며 날 선 태도를 유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저는 믿습니다. 90분간의 치열한 승부 끝에 서로의 손을 맞잡는 그 순간, '적대적 두 국가'라는 정치적 수사(修辭)보다는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DNA를 가진 '동포'의 원초적 이끌림이 먼저 작동할 것임을 말입니다.
축구공이 그리는 평화의 궤적
저는 지난 수십년간 기자로서 수많은 인연을 이어왔고, 근래는 남북 겨레 화합과 교류의 고리를 잇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해 왔습니다. 이번 경기는 단순히 아시아 챔피언을 가리는 자리가 아닙니다. 12년 만에 남쪽 땅을 밟는 북측 선수들의 발걸음은, 막혀버린 남북 대화의 숨통을 틔울 수 있는 소중한 '길트기'가 되어야 합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화성(華城)의 도시 수원이 역사적인 무대가 된 것도 예사로운 인연은 아닐 것입니다. 수원 화성은 정조의 지극한 효심이 탄생시킨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꽃으로 꼽히는 곳입니다. 성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건축물이지만, 수원 화성을 쌓은 후에 이곳에서 전쟁이 벌어진 적은 없습니다.
정치적 계산을 떠나, 우리 시민들이 경기장을 가득 메우고 남과 북 두 팀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는 장면은 상상만 해도 아름답습니다. 남녘 동포들의 뜨거운 함성이 평양국제축구학교에서 꿈을 키웠던 선수들의 마음속에 '따뜻한 정'으로 새겨질 것입니다. 둥근 축구공은 남북 스포츠 교류의 재개를 알리는 축포가 되고, 경색된 남북 관계에 '역발상의 지혜'를 제공하는 반전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2019년 평양 능라도의 바람을 타고 들려오던 아이들의 공 차는 소리가, 2026년 수원종합운동장의 함성과 만나 언젠가 하나로 울려 퍼질 그날을 기다려 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언론인들이 기록해야 할 가장 아름다운 평화의 승전보(勝戰報)가 아닐까요.
‘글로벌웹진’ 뉴스로 칼럼 ‘로빈의 스포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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